연중 제30주간 금요일 강론 (루카 14,1-6)
찬미 예수님!
오늘 복음도 그러하지만 가끔씩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예수님에게 당대의 종교지도자들이 보인 반응이 조금은 의아하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왜 너무나도 분명하게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는 것이 합당하냐? 합당하지 않으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혹은 사람을 살리는 일이 옳으냐? 죽이는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라는 분명한 물음에 주님 이라고 고백은 못할지라도 선생님 옳은 말씀입니다 라고 말하지 하지 못하고 오늘 복음의 그들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였을까 생각해 보게 됩니다. 사실 오늘 복음에선 대답을 못하고 말지만, 다른 복음에선 안식일에 병을 고치시는 예수님을 정작 앞에선 군중이 두려워 어쩌지 못하고 뒤에선 예수님을 헤칠 궁리를 합니다.
사실 여기엔 그들 마음의 완고함이 있습니다. 그들의 눈을 멀게 한 완고함이 누가 봐도 분명한 가르침을 보고도 보지 못하게 합니다.
사실 우리 안에도 그러한 크고 작은 어리석음과 완고함이 있습니다. 성당의 어느 쪽에 앉는 것이 더 하느님에게 가까이 있을 거라는 말도 안 되는 생각 예를 들어 성체 가까운 쪽 제일 앞이 하느님께 가장 가까이 있을 거라는 그런 논리로 따지면 수녀님이 하느님에게서 제일 멀리 있겠지요! 저런 죄인은 성체를 영하면 안 된다는 교만한 생각은 죄의 많고 적음은 하느님만이 판단할 일이며 죄인을 부르러 주님이 오셨음을 믿지 않는 말입니다. 이렇듯 크고 작은 완고함을 누구나 갖고 살아가기 마련입니다.
사실 누구나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마음의 완고함을 갖고 살아갑니다. 때로 그것이 신념이 되기도 하지만, 정작 오늘 복음의 그들처럼 주님의 말씀을 또 그분의 정신을 거부하는 일이 되지 않기 위해선 항상 자신의 완고함이 무엇인지를 복음의 빛으로 비추어보아야 합니다.
오늘 하루 복음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모습을 묵상하며 내안에 주님을 거부하는 완고함은 무엇인지 돌아보는 하루를 보내도록 합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