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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야기나눔] 9월 3일 순교
  ۾ : 요안나     ¥ : 09-09-02 00:48     ȸ : 3551     Ʈ ּ
   http://saint.paolo.net/103.php (928)

성녀 권희 바르바라 (09월 20일) 1839.9.3 순교 한국 부인



권 희(바르바라, 1793-1839)

권 희 바르바라는 이 광헌의 아내요, 이광열의 형수가 되며 이 아가타의 어머니가 된다. 본래 외교인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23세에 남편과 같이 천주교에 입교했다. 그의 남편이 서울에 거쳐하면서 회장으로서 주교와 신부를 보필하고 있었으므로 내조자로서의 그는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앵베르 주교와 전교 신부들에게 숙소를 제공했으며, 교우들이 그이 집에서 고해성사를 타당하게 예비하도록 여러 교우들을 힘써 인도하고 가르쳤다. 그리고 미사에 참례케 하였다.


1839년 4월 7일(음력 2월25일) 한밤중에 포졸들이 습격해와 체포되었다. 체포된 가족 중에느 17세의 아가타와 12세의 다미아노라는 어린 자녀가 끼어있었다. 그는 수많은 형벌을 당하였다. 특히 그의 마음을 가장 괴롭게한 것은 자기와 같이 붙잡혀 들어와서 혹독한 곤장을 여러 차례 맞고 주림과 목마름과 추위로 가혹한 시련을 당하는 열일곱된 이 아가타와 12세된 다미아노의 고통이었다. 어린 것들이 목마름과 열병의 옥고를 겪고 있다는 말을 자주 들어야 했던 어머니(권 바르바라)된 마음으로서 얼마나 마음을 태웠으리오마는 그러나 천주를 만유위에 사랑하는 그의 마음을 굽히지는 못하였다. 권 바르바라는 너무나도 무례한 언동을 한다고 포교배를 꾸짖은 일이 있었다. 이 때 그의 남편의 경고를 듣고 크게 깨달은 바 있어 그 후로는 형벌과 욕을 많이 받았으나 다 감수 인내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권 바르바라 일가족은 모두 같은 날 체포 되었다. 그리고 같은 날에 사형선교를 받았다. 또한 같은 날에 같이 순교하기를 간절히 원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우리나라 법에 아주 가까운 친척을 한날에 죽이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으므로 부득히 부부 중 한명의 사형집행이 연기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권 바르바라는 남편이 순교한 후 여러 차례의 곤장과 주리를 틀렸으나 끝내 관헌에게 굴복하지 않고 남편이 순교한 뒤 4개월 후인 1839년 9월 3일 서소문 밖에서 46세의 나이로 참수치명하였다.



성녀 박큰아기 마리아 (09월 20일) 1839.9.3 순교 한국 부인



박 큰아기 (마리아 1785-1839)

박 큰아기 마리아는 1785년에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입교 동기와 출가한 후와 전해 내려오는 말같은 것은 별로 없다. 시집을 가서 남편이 있다는 것은 사실이나, 생별인지, 사별인지도 알수 없다.


여하간 다음에 나오는 동정궁녀 박희순(루시아)의 언니 되시는 분이다.
동생인 희순이가 궁중에서 빠져 나온 후로 그들 자매는 완강한 외교인 아버지를 피하여 조카집에서 함께 생활하였다.


그는 본시 충직하고 순수하였다. 자매가 함께 있으면서 의식을 절약하여 애긍에 힘썼으며, 묵상과 신공을 부지런히 하여 신자의 본분을 착실히 지켰다.


기해박해 때 조카집에서 1839년 4월 15일 동생 희순과 함께 체포되어 포도청을 거쳐 형조로 이송되어 희순과 함께 같은 날 참형이 선고되었으나 전장에서 말한 바와 같이 두 근친자를 한날 죽이는 것은 조선법에 금지되어 있으므로 희순이 먼저 처형되고, 언니는 집행이 연기되었다. 박 큰아기의 행적과 신심의 표현은 비록 나타난 것이 없으나, 동생 희순과 함께 잡히어 같은 형벌을 받은 것은 거의 확실하다.


다음에 나오는 그의 동생 희순(루시아)의 빛나는 순교에 비길만한 것은 못되어 약간 빛을 잃은 느낌이 없지 않지만, 그러나 끝까지 신앙을 견지하면서 일생 중에 또는 죽을 때 훌륭한 신앙심과 위대한 영혼의 모범을 보여준 것으로 보아 그의 동생 못지 않게 도를 행하고 증거하였을 것이 분명하다.


희순 루시아가 처형된지 4개월후 1839년 9월 3일 서소문 밖에서 참수치명하니 그의 나이 54세였다.



성 박후재 요한 (09월 20일) 1839.9.3 순교 한국 상인

박 후 재(요한 1798-1839)

조정이 일시 교우의 검거마저 등한시해 가며 충청도 일대에서 모방신부와 샤스탕 신부 등 소위 양인 두명을 체포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집중시키고 있는 동안 서울에서는 9월 3일 박후재를 선두로 6명의 교우가 그들의 고귀한 신앙을 고수하기 위하여 혈제를 올려야 했다.

박후재 요한은 1798년에 경기도 용인에서 태어났다. 원래 부모가 교우였던 관계로 그는 이미 유아시에 세례를 받았으나 신부로부터 보례를 받은 것은 거의 중년에 이르러서이다.

관변측 기록에는 그의 이름이 후재로 되어 있었으나 기해일기에는 명관으로 되어 있느 것으로 보아 교우들간에는 명관으로 불린 듯하다.

명관의 생애와 순교사실에 괸해서는 기해일기 외에도 바로 명관의 아내 안나의 생생한 증언으로 그 확실성을 한층 더해주고 있다

원래 친척이 없어 고독한 처지에 신유년(1801년)의 박해로 아버지 박 라우렌시오마저 여윈 이래 어머니를 모시고 서로 의지하며 살았다.

박후재는 양반도 아니요 부자도 아니지만 항상 참수 치명한 아버지의 피가 그의 혈관 속에 흐르고 있다는 것을 자랑으로 삼고 있었다.

안나의 부모가 그의 딸을 후재오 결혼시킨 이유는 당시 모든 교우들이 후재의 덕행을 칭찬해 마지 않았기 때문이다.

박후재가 결혼한 것은 36세 때의 일이고 그 때 그는 한강가에 있는 오막살이에서 지내고 있었다. 어머니는 멀고 가까움을 따질 것 없이 교우집에 물을 길어다 주는가 하면 아들은 짚신을 삼는 일로 근근히 목숨을 이어 나갔다. 그러나 후재는 이러한 빈궁을 기쁜 마음으로 참아받으며 또한 기해년 정월에 어머니가 선종할 때까지 항상 늙은 어머니에게 지극한 효성을 다했다. 그의 아내안나는 아직 나이가 젊었던 관계로 이와 같이 큰 가난을 참아 내기가 어려워 가끔 불평하는 말로 남편을 괴롭히곤 했다.

그럴 때마다 후재는 고통을 잘 참아 받으라고 아내를 타일렀다.
하루는 사람이 자기 영혼을 구하려면 자기의 비천한 육신의 곤궁을 어떻게 참아받아야 할 것인가를 구체적으로 예를 들어 말하기를 "옛날 어떤 성인은 자기의 썩은 몸에서 구더기가 기어 나와 땅에 떨어지는 것을 보고 그것을 지어서 다시 종기에 더 넣으며 먹을 것을 두고 어디를 가느냐고 말했다닌 우리네 것 같은 조금한 고통 쯤 못 견디어 낼 것이 무엇이오"하고 도리어 반문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후재는 평상시에 교회의 본분을 충실히 이행하였고, 일을 부지런히 하여 항상, "내 영혼을 구하려면 치명을 해야 해"하고 말했다. 또한 짚신 만드는 방망이로 자기 정강이를 치는 고생도 하였다. 기해년 4월에 박해가 치열해지자 후재는 아내에게 "교우들이 많이 붙잡혔으니, 우리도 더욱 조심합시다"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자신은 조금도 두려워 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 때 돈이라고는 한푼도 없었는데 큰 그릇을 40푼에 팔아서 20푼은 자기가 갖고 나머지 20푼은 아내에게 주며 마음대로 쓰라고 했다.

바로 그 날 저녁 후재는 아내더러 숙모집에 가서 하룻밤을 지내고 오라고 말하였다. 이튼날 아침 아내는 남편이 데려오기를 기다렸으나 오정이 되어도 아무 소식이 없어 그 때서야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생겨 사촌오빠 치화를 보내어 알아보게 하였더니 돌아와서 전하는 말이, 지난 밤에 포졸들이 와서 그의 남편을 잡아갔다는 것이었다.

이 때가 기해년 5월 3일이었다. 그러나 실은 자기 남편이 어떤 예비 교우에게 고발당한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재의 아내는 "그이는 미구에 잡힐 것을 예감하였으며, 그래서 나를 숙모집으로 보낸 것으로 믿는다"고 증언했다.

후재는 사관청을 거쳐 포청으로 인도되었다. 종사관이 후재의 성명과 내력을 묻고 난 다음 포장이 직접 문초하기를 "배주하고 일당을 대라"고 위협했다. 그러나 후재는 "죽사와도 못하겠습니다."하고 대답했다 이에 치도곤 40대를 치니 후재의 살이 떨어지고 피가 흘러 내렸으나 끝내 굴복하지 않았다.

이때 또 주리를 틀며 달래고 때리고 여러 방면으로 유인해 보았으나 그의 의지를 더욱 굳게 해 줄 뿐 아무 소용이 없었다. 뿐더러 후재는 교우와 도적들 앞에서도 주야로 그치지 않고 설교도리를 강론하였다.
후재의 처남 치화는 성교이야기를 들어 알고는 있었으나 아직 입교는 하지 않고 있었으므로 감옥에 드나들며 그 곳 사정을 탐지해 낼 수 있었다.

하루는 후재를 보러 감옥에 갔더니 후재가 처남에게, "나는 치도곤 40대를 맞아 죽은 사람처럼 되었으나 이제는 보는 바와 같이 부활했네"하고 말했다고 한다.

또한 치화는 후재의 사형집행도 목격했는데, 희광이가 후재의 목을 내리쳤으나 그의 목이 도무지 떨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자 희광이는 오랫동안 칼을 돌에 갈았다. 그 동안 후재의 전신은 무서운 경련을 일으키며 떨었다.

이윽고 희광이가 돌아와서 그의 목을 완전히 내리쳐서 그의 순교를 완수시키니, 때는 1839년 9월 3일 장소는 서소문 밖 네거리, 그의 나이 41세였다.

후재가 형조에게 아내에게 편지를 보내, "곧 나간다"고 말한 적이 있다.
아내는 처음에는 이 말을 출옥으로 잘못 알아들었으나 곧 그 참 뜻이 출문임을 깨달았다. 즉 후재는 나간다는 말로서, "드디어 사형이 선고되었으나, 곧 서소문 밖으로 나갈 것이다"라는 뜻으로 한 것이다.


성녀 이연희 마리아 (09월 20일) 1839.9.3 순교 한국 부인



이 연 희(마리아, 1803-1839)

이연희 마리아는 남명혁 다미아노의 처이다. 그녀는 영리한 머리와 남성적인 용기를 가졌으며 열심하며 교리에 밝아 많은 여교우들을 가르쳐 성사를 타당히 받도록 지도했다. 그는 남편과 같은날 순교하기를 간절히 원했으나, 당시 법에는 허용되지 않았다.


그의 남편 남 다미아노가 회장으로 있으면서 자기집을 공소로 사용하고 마치 교우들의 여관으로 사용하였으며, 주교와 신부를 보필하고 있으므로 공소때가 되면 자기집을 공소로 제공하였으므로 주교와 신부를 정성껏 집에 모시고 봉사하며 내조로써 헌신적으로 일했다는 것이 분명하다. 체포경위는 남 다미아노와 같고 체포 당시 이 마리아는 12세 난 어린 자식이 있었다. 그러므로 어머니는 그들 자신이 겪어야 했던 수 많은 형벌은 말 할 것도 없이 특히 마음을 가장 아프게 한 것은 어린 자식이 받는 고통이었다. 그는 열두살된 아들과 서로 다른 감방에 갇혔는데, 형리들이 그 아들을 형벌한 뒤 잔인스럽게도 싱글벙글하며 와서 이 가엾은 어머니에게 그 이야기를 하였다. 그는 아들이 가혹한 형벌을 이기지 못하여 혹 배교하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그럴 때일수록 그는 설레는 가슴을 진정하고 아니 그보다도 마음을 천주께 향하며, "이것은 주의 가장 크신 영광을 위하는 것입니다."하고 말하며 평온한 마음을 조금도 잃지 않았다.


또한 체포당시 포졸들이 무례함을 보고 언동을 준절이 꾸짖었다. 그러나 남편 남 다미아노로부터 "교우는 천주를 위해 순량한 양같이 죽어야 하는 것이니, 이런 훌륭한 기회를 놓치지 말라"는 주의를 듣고서는 모욕과 학대를 받으면서도 원망하지 않고 참아 내었다.


그는 마음을 송두리째 바쳐 천주를 진실히 사랑하였고, 그 영혼의 원은 오직 천국을 향하여 있었다고 어떤 증인이 단언하였다. 이 마리아는 여러 차례에 걸쳐 곤장을 맞고 주리를 틀렸다. 마침내 이 마리아에게 참수형이 언도되어 1839년 9월 3일 당일 지체없이 참수 치명하니 그의 나이 36세였다.



 성녀 김효주 아녜스 (09월 20일) 1839.9.3 순교 한국 동정


한국에는 여러 대를 내려오며 순교자를 낸 교우 집안이 여럿이 있다. 이는 충렬한 희생심이 혈통과 같이 대대손손 전해지기 때문이다.
성녀 아녜스 김효주(金孝珠)는 성녀 김효임의 동생으로 서울 근교 밤섬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를 여읜 후 가족들과 함께 입교하여 언니인 김효임 골롬바, 동생인 글라라와 함께 수정(守貞)을 결심하고 기도와 덕행에 노력하였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그해 4월에 이사해 살고있던 경기도 고양땅 용머리에서 언니 김효임과 함께 체포되었다. 가혹한 형벌을 받았지만 한마디 소리없이 침묵 속에서 기도하면서 참았다. 옷을 벗겨 공중에 매달아 번갈아 때리는 학춤이라는 형벌을 받기도 하였으며, 남자 죄수들이 있는 감옥에까지 가두어졌으나 주님의 은총으로 큰 힘을 얻어 남자들을 물리치기도 하였다.
9월 3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5명의 교우와 함께 참수형을 받아 언니보다 20여일 먼저 순교의 화관을 쓰고 천국의 영원한 가족이 되었다.



 성녀 이정희 바르바라 (09월 20일) 1839.9.3 순교 한국 과부

성녀 바르바라 이정희(이정희)는 성녀 허계임의 딸이면서 성녀 이영희의 언니로, 경기도 봉천의 외교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과부가 되어 집에 돌아온 고모 이매임의 가르침과 권면으로 어머니, 동생과 함께 입교했다.
비신자인 아버지는 비신자와 결혼시키려 하였는데, 그의 양심이 허락치 않아 다리가 아프다는 핑계로 3년 동안을 앉은뱅이 노릇을 했다. 결국 신자인 청년과 결혼하였지만 결혼 후 2년만에 남편을 여의고 잠시 친정에 있다가 상경하여 고모와 동생과 함께 살면서 열심히 수계하였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고, 이해 4월초 남명혁과 이광헌의 어린 자녀들이 혹형과 고문을 이겨내고 신앙을 지켰다는 이야기를 듣고 감동하여 순교를 결심한 후 당시 한집에 함께 살고 있던 이매임, 이영희, 김성임, 김루시아, 그리고 성사를 보러 상경한 어머니와 함께 4월 11일 남명혁의 집을 파수하던 포졸들에게 자수했다 . 그후 포청과 형조에서 여러가지 고문과 혹형을 끝까지 이겨내고 9월 3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5명의 교우와 함께 참수형을 받고 영원한 천국의 문으로 들어섰다.



테아   09-09-02 12:41
편안한 삶 다 버리고 이토록 가혹하고 모질고 기 막힌 형벌과 죽음을 택하신 순교 선조들, 읽다가 눈물이 다시 앞을 가립니다. 지금은 주님 곁에서 우리를 위해 주님께 빌어 주시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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