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와 고통의 극복대책 2가지
우리의 상처와 고통에 대해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첫째, 초자연적 치유를 모색 할 것이 아니고 초자연적 투신을 모색하여 우리의 상처와 어려움의 친구가 되려고 해야 한다.
참 치유는 상처로부터 도망쳐서 되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 상처에로 다가서서 그 상처와 고통을 적극적으로 껴안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고통을 끌어안을 용기를 찾아내야 한다.
참 치유가 어려운 것은 많은 경우에 그 고통의 실체를 알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고통에 직면하고, 그 고통을 통하여 그 고통을 살아야 한다.
물론 내 안에서는 다가오는 고통을 피하고 그로부터 도망치며, 눈길도 두지 말라고 종용하는 유혹이 계속될 뿐이다. 영성 생활에 있어 위대한 비밀 하나는 하느님의 사랑 받는 아들이요, 딸로서 기쁨이든 슬픔이든, 즐거움이든 아픔이든, 건강이든 병이든 이 모든 것이 우리 인간성의 충만한 실현에로 나아가는 여정의 한 부분이라는 사실이다. 참 치유와 돌봄은 서로 서로를 도와서 우리의 상처와 고통이 기쁨에 이르는 문이 되게 하는 것이다.
둘째, 우리의 아픔과 고통을 축복의 질서아래 재 정돈해야 한다는 것이다.
죽음으로 사랑하는 가족 중 하나를 잃거나, 실직하게 되었을 때, 어떤 시험에 낙방했을 때, 별거나 이혼을 해야만 되는 상황이 닥칠 때, 전쟁이 몰아치고, 지진이나 재앙으로 우리의 집과 가정이 날아가 버렸을 때, 왜 하필이면 나이고 왜 하필이면 지금이며, 왜 하필이면 여기 이 자리이냐는 의문이 생긴다. 그럼에도 하느님의 사랑 받는 자녀인 우리들은 어렵더라도 우리의 고통과 상처를 어둠과 저주의 그늘로부터 축복의 빛 아래로 옮겨내야 된다. 견딜 수 없을 것 같은 시련이 도전으로 바뀌고, 처절한 절망이 정화되고 단련이 되며, 혹독한 꾸지람이 부드러운 조언이 되고, 저항과 거부가 깊은 통교의 길이 되어야 한다. 기쁨과 슬픔이 반대되는 양극단이 아니라 우리 존재의 양면이 되는 것이다. 망가지고 깨어진 유리조각 하나하나가 보석처럼 빛을 발할 수 있게 해야 한다.
김건중 벤야민 신부 - 2001년 12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