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신자들은 사순 시기에는 천국 문이 활짝 열려 있다고 믿었습니다. 사순 시기만 되면 많은 사람들이 희생과 기도를 받쳤으며, 특히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구원하기 위해 수난을 겪는 시기이기에 천국의 문이 더 활짝 열려 있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노인들은 가급적이면 사순절에 죽는 것을 원했던 것입니다. 노인들이 사순절에 운명하시면, ‘복을 받았다.’라는 축원의 말을 하는 것도 다 사순 시기의 은혜로움을 표현한 것입니다. 요즘은 가족 구성원 간에도 취향이 다르기에 텔레비전을 함께 보지 않고, 각 방에서 각자가 원하는 채널을 보거나 인터넷에 빠져 있을 때가 많습니다. 전 보다는 문화의 혜택을 많이 누리고 있지만, 텔레비전이나 인터넷 문화 때문에 가정 구성원 간에 대화가 점점 없어지는 형편입니다. 그리고 서로가 서로에게 무관심하여 외로움에 빠져들고, 가정은 그저 먹고 자는 하숙집에 불과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너무나 자신들이 원하는 것에만 지나치게 빠져들고 묶여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오늘날 많은 이들이 무엇에 묶여 있고 빠져 있는지 모르고 산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예수님은 성령의 인도를 받아 광야에 나아가 자신을 깊이 바라보기 위해, 40일 동안 아무 것도 먹지 않고, 정화의 시간을 통해 자신을 바라봅니다. 예수님께서는 빠져들고 묶일 수 있는 유혹에 당당하게 맞서십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이다.”라고. 사람은 짐승처럼 네 발로 땅 위를 기어 다니는 존재가 아니라, 두 발을 땅 위에 딛고 머리를 하늘로 향해 저 높은 곳으로 향하는 존재입니다. 그러기에 사람은 빵으로 배만 채우려 할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으로 영혼을 채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짐승과 달리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인간이기에 결코 배만 채운다고 살아갈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따라서 사는 것임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부귀영화에 대한 유혹에 “주님이신 너의 하느님을 예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부귀영화와 권세가 인간들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만이 우리를 영생으로 이끌어 주심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악마는 예수를 성전 꼭대기로 데리고 가서 거기서 안전하게 뛰어내릴 것을 제의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떠보지 말라.”고 대답하십니다. 예수님은 능력을 발휘하여, 모든 사람들 위에 군림하는 왕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며, 인간들을 압도하고 그 위에 군림하기보다는, 하느님의 능력에 철저히 의지하는 약한 인간이 되시고자 합니다. 하느님의 권능 앞에서 인간이 지닌 능력은 보잘것없는 존재에 불과합니다. 하느님 앞에 귀의할 수 있는 첫걸음은 하느님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솔직하게 누구인지를 바라보는 일입니다. 여기에서 신앙이 시작됩니다. 불행하게도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깨닫지 못하고 자신이 원하는 것만을 추구합니다. 하느님을 믿기보다는 자신의 능력을 한껏 발휘함으로써 스스로 삶의 주인이 되려고 합니다. 이것은 교만이요, 멸망의 시초입니다. 아담과 하와도 하느님이 되고자 하는 교만 때문에 망합니다. 한 없이 높아지려고 바벨탑의 명예도 다 무너지고 맙니다. 자신의 원하는 것에 지나치게 빠져들지 말고, 은혜로운 사순시기에 하느님의 능력에 의지하여 자신을 돌아볼 수 있을 때 자신을 꽁꽁 묶어있는 것으로부터 해방되는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