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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수사님의 글
  ۾ : 안드레졦     ¥ : 10-10-30 14:21     ȸ : 2197     Ʈ ּ

어느 수사님의 글

수도원 오기 전 세속에 있을 때 이런 농담을 자주 했었습니다.
"서당 개 3년이면 풍월을 읊고 식당 개 3 년이면 라면을 끓인다."

수도원에 오니 '콜리'종의 암컷 개가 한 마리 있길래('복실이'.. 너무도 멋진 외모에 비해 이름이 촌스러워 극도의 부조화를 이룸)
"수도원 개 3년이면 성무일도를 바친다." 라고 했습니다.

그런 시덥잖은 우스개 소리만 하고 살던 어느 날이었는데...
어느 날 보니까 개집 안에 복실이는 없고 고양이가 한 마리 있는 것이었습니다.
복실이는 밖에 나와 있고...
그리고 먹으라고 챙겨 준 복실이의 밥은 또 고양이 차지가 되어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알고 보니 정처 없이 떠도는 부랑자(?) 고양이를 먹여주고 재워주고 한 것이었습니다.
그것도 하루가 아닌 며칠 동안...

그리스도인으로 생각하는 나 자신이, 수도원 지원자로 사는 나 자신이
너무도 부끄러운 날이었습니다.
나는 언제 다른 이를 위해 내 집을 내어주고 내 먹을 것을 주었던가.
그저 남는 자리 있으면 나 사는데 지장 없으니 비켜섰고
배불러 못 먹으니 남는 밥 던져줬을 뿐...

주제에 수사 된다는 스스로가 갑자기 너무도 한심해져서 한동안 많이도 울었더랬습니다.
복실이 전담 양육사 이시도르 수사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복실이는 아마도 개가 아니거나 '개' 이상의 '개' 다."

개조차도 이토록 숭고한 성덕을 닦고 있을 때 개보다 많이 배우고 들은 나는
이 나이 먹도록 뭐하고 살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고도 수도승이 된답시고 설쳐대니...

복실아... 너야말로 진짜 '수도승' 이다.
수도복을 입어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너구나...

거룩하신 주 하느님. 동물들을 통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시니...
제 눈에는 다만 놀랍게만 보이나이다. 아멘...

이기정 신부 홈페이지 “아름다운 글 모음”에서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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