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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요안나 프란
  ۾ : 테아     ¥ : 09-08-12 13:25     ȸ : 2154     Ʈ ּ
   Annecy.hwp (417.0K), Down : 30, 2009-08-12 13:25:50

 

 

 
성인명 요안나 프란치스카 드 샹탈(Jane Frences de Chantal)
축일 8월 12일
성인구분 성녀
신분 설립자, 수녀
활동지역
활동연도 1572-1641년
같은이름 방지가, 요한나, 잔, 잔느, 쟌, 제인, 조안, 조안나, 조한나, 프란체스카


   1572년 1월 23일 프랑스 동부 부르고뉴(Bourgogne) 지방 디종(Dijon)에서 귀족 가문의 둘째 딸로 태어난 성녀 요안나 프란치스카 드 샹탈(Joanna Francisca de Chantal)은 18개월 만에 어머니를 여의고 엄격한 가톨릭적 분위기 속에서 아버지로부터 폭 넓은 교육을 받으며 성장하였다. 20세 때에 크리스토프 드 샹탈(Christophe de Chantal) 남작과 결혼한 그녀는 충실한 아내이자 헌신적인 어머니요 검소하고 알뜰한 주부로서 몰락의 위기에 처해 있던 집안을 일으켜 세웠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성(城)에서 매일미사를 봉헌하는 관례를 만들었고, 다른 성의 신심활동을 도입하여 소개하면서 자선활동도 열심히 하였다. 그들 부부는 6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그 중 둘은 유아 때 사망하였다. 게다가 1601년 남편이 사냥을 나갔다가 불의의 사고로 사망하자 그녀는 네 명의 자녀와 함께 친정으로 돌아와 신앙생활에 전념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시아버지로부터 자신이 살고 있는 몽틀롱(Monthelon)으로 오지 않으면 손자들의 상속권을 박탈하겠다는 위협을 받고 할 수 없이 몽틀롱으로 가서 7년 동안 자녀교육에 힘쓰며 살았다.

   1604년 사순시기 동안 친정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디종을 방문한 성녀 요안나 프란치스카 드 샹탈은 마침 그곳을 방문한 제네바(Geneva)의 주교 성 프란치스코 드 살(Franciscus de Sales, 1월 24일)의 설교를 듣고 대단한 감명을 받아 그의 영적 지도를 청하였다. 처음에 다소 망설이던 주교는 결국 그녀의 간청을 받아들였고 여러 번의 만남을 통해 서로 영성적인 교감을 나누게 되었다. 그 후 그녀는 다시 결혼하지 않을 것과 주교에게 순종할 것을 서원하였다. 디종의 카르멜회 수녀들과 만남을 통해 큰 영향을 받은 그녀는 자신을 하느님께 전적으로 봉헌하고자 원했으나 주교는 좀 더 인내를 갖고 기다리도록 했다.

   1607년에 성 프란치스코 드 살 주교는 그녀에게 영성적으로는 성모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하였을 때에 드러내었던 덕들을 따르고, 활동적으로는 노인들과 병들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자선활동을 하는 수도 공동체를 세우려는 자신의 계획을 설명하였다. 이에 뜻을 같이 한 그녀는 주교의 도움으로 자녀들의 장래 문제와 집안의 대소사를 해결한 후 안시(Annecy)로 떠났는데, 그곳은 주교가 새로운 수도회를 세우고 싶어 하던 곳이었다. 1610년 6월 6일 삼위일체 대축일에 성 프란치스코 드 살 주교는 안시 수도원의 축성식을 거행하였다. 그녀와 2명의 동료들이 그 자리에 함께 참석해 주교로부터 정식으로 회칙을 받았으며 이듬 해 그들 모두 수도 서원을 하고 그녀가 원장이 되었다. 이 수도회의 이름과 회헌은 여러 번 바뀌어 오다가 마침내 ‘성 마리아 방문 수도회’를 공식 명칭으로 확정하였다. 이 수도회는 1612년 1월부터 병자방문을 시작하여 사람들로부터 칭찬과 경탄을 불러일으켰다. 이듬해 그녀는 시아버지의 사망과 함께 많은 재산을 상속받은 후 더욱 영성적인 성숙에 힘쓰며 수도회의 새로운 분원 설립에 주력하였다.

   1614년 리옹(Lyon)에 새로운 수도원을 설립하면서 많은 난관을 겪기도 했지만 그 모든 시련에도 불구하고 성녀 요안나 프란치스카 드 샹탈은 성 프란치스코 드 살 주교의 도움을 받아 수도원을 급속히 확장해 나갔고 많은 여성들이 입회하였다. 이러한 성공적인 확장은 육체적인 고행보다는 겸손과 온화함을 강조한 주교의 가르침과 그녀의 신중함과 헌신 덕분이었다. 1619년에 그녀는 파리(Paris) 분원을 설립하면서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Vincentius a Paulus, 9월 27일)를 만나게 되었는데,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는 성 마리아 방문 수도회의 초기 정신과 활동 방향을 옹호하였을 뿐만 아니라 성 프란치스코 드 살 주교가 사망한 후에는 그녀의 영적 지도자가 되어 주었다. 성 프란치스코 드 살 주교가 사망하던 1622년 당시 성 마리아 방문 수도회의 분원은 13개였고, 프랑스 전역으로 확장되어 그녀가 사망할 당시 약 86개의 분원이 있었다.

   그녀는 수도회 내적, 외적인 시련을 견디어 내면서 계속해서 분원을 설립하기 위해 거처를 옮겨 가며 생활하였다. 1628년 흑사병으로 많은 수도자들이 사망한 후 안시 수도원으로 돌아온 그녀는 다시금 장상을 역임하다가 1641년 마지막으로 파리에 가서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를 만나고 돌아온 후 느베르(Nevers)에서 병을 얻었다. 결국 물랭(Moulins)의 분원에서 몸져누운 그녀는 1641년 12월 13일에 그 수도원에서 선종하였다. 그녀의 시신은 안시로 옮겨져 성 프란치스코 드 살 주교의 무덤 곁에 묻혔다. 그녀는 1751년 11월 21일 교황 베네딕투스 14세(Benedictus XIV)에 의해 시복되었고, 1767년 7월 16일 교황 클레멘스 13세(Clemens XIII)에 의해 시성되어 1769년부터 로마 전례력에 포함되었다. 그녀의 생애에 대한 기록은 성 프란치스코 드 살 주교가 쓴 “신심생활 입문”(The Introduction to the Devout Life)에 잘 나타나 있다.

   2001년 12월 18일 교황청 경신성사성의 교령에 의해 성녀 축일의 전례적 기념일이 12월 12일에서 8월 12일로 변경되었다. 그 이유는 1999년 3월 25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가 라틴아메리카의 수호자로 선포한 ‘과달루페(Guadalupe) 성모 축일’과 같은 날이어서 전례적인 기념에 어려움이 있기 때문이었다. 이런 이유로 미국에서는 그녀의 축일을 8월 18일로 변경하여 기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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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요안나 프란치스카 드 샹탈 수도자

 

 

1572년 프랑스의 디종에서 태어났다. 샹탈의 남작과 결혼하여 6명의 자녀를 낳았고 그들을 경건히 길러냈다. 남편이 세상을 떠난 후 프란치스코 살레시오의 지도하에 완덕의 길을 기꺼이 걸어갔고 특히 가난한 이들과 병자들 가운데에 자선사업을 많이 했다. '방문회'라고 하는 수녀회를 설립하여 슬기롭게 지도했다. 1641년에 세상을 떠났다.

 


성녀 요안나 프란치스카 수녀의 제자가 쓴 [비망록]에서
(Francoise-Madeleine de chaugy, Memoires sur la vie et les vertus de Sainte J.-F. de Chantal, III, 3: 3th edit., Paris 1853, pp. 306-307)

사랑은 죽음만큼 강하다

 

어느 날 복되신 요안나는 다음과 같은 열정적인 말씀을 하셨다. 이 말씀은 즉시 충실히 기록되었다. "지극히 사랑하는 딸들이어, 교회의 기둥인 우리의 많은 교부들은 순교를 당하지 못했습니다. 왜 그러했다고 생각합니까?" 자매들 각자가 이 질문에 대답한 후 복되신 어머니는 말씀을 계속하셨다. "그것은 사랑의 순교라고 하는 또 다른 순교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순교에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종들이 당신의 영광을 위해서 계속 일할 수 있도록 그들이 생명을 존속시키시어 그들이 동시에 순교자와 증거자가 되게 하십니다. 방문회의 자매들은 이러한 순교로 부름받았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원하신다면 여러분 중 그것을 청하는 가장 복된 이들은 이 순교를 이룰 것입니다."


이때 어떤 자매가 이런 순교를 실제로 어떻게 할 수 있느냐고 질문했다. 어머니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여러분 자신을 하느님께 온전히 바친다면 그것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실상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 영혼의 가장 깊숙하고 은밀한 데까지 당신의 칼로 찔러 넣으시어, 우리를 우리 자신에게서 잘라 내시기까지 하십니다. 나는 어떤 폭군이 칼로 영혼을 육신에게서 잘라 내듯 사랑이 자기가 좋아했던 모든 것에서 잘라 버리게 한 한사람을 알았습니다."


우리는 어머니께서 자신에 대해 이 말을 하고 계시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른 자매가 이러한 순교가 얼마나 오랫동안 지속될 수 있느냐고 여쭈어 보았다. 어머니의 대답은 이러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무조건적으로 하느님께 바치는 순간부터 죽는 순간까지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낌없이 바치고 자신을 위해선 아무것도 남겨 두지 않으며 사랑을 충실히 섬기는 사람에게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연약한 사람이나 사랑과 항구심이 부족한 사람에게 이 순교의 은혜를 주시지 않고, 다만 그들이 당신에게서 떨어져 나가지 않도록 평범한 길로 나아가는 것을 허락하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자유 의지를 강제하시지 않습니다."


끝으로 누군가가 이러한 사라의 순교가 육신적 순교에 비교될 수 있는 순교인지 여쭈어 보았다. 어머니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비교에 대해 염려하지 마십시오. 여하튼 '사랑은 죽음만큼 강하다.'는 말이 있듯이 육신적 순교에 못지않게 이 사랑의 순교도 위대합니다. 사랑의 순교자들은 하느님의 뜻을 완수하려 할 때, 순교자들이 신앙과 사랑과 충실성을 증명하려고 일천 번 목숨을 바칠 때보다 생활하는 동안 일천 번 더 잔혹한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프란츠살레스성인과 요한나프란치스카 샹탈의 성인유해가 있는 성당,Annecy(앙시)
 

 

프란츠 살레스 성인의 묘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요한나 상탈의 묘 (요안나 프란치스카 드 샹탈(Jane Frences de Chantal))
 

두 성인이 모셔져있는 성당 제대, 예수님얼굴만 빛난다.
 

혹 사진이 안보이시면 첨부한 Annecy.hwp 클릭해보세요 ^^

 

 


요안나   09-08-13 00:51
12월 12일에서 8월로 옮겨진 축일이지요^^
저의 성인입니다.
좋은글 감사합니다.
테아   09-08-13 12:24
나를 죽이고 예수님이 사시게 되는 사랑의 순교를 다시 한번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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