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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르스의 성자
  ۾ : 테아     ¥ : 09-08-04 08:04     ȸ : 2465     Ʈ ּ
 

[사제의 해 기획-사제의 사제] 1. 아르스의 성자 성 비안네 신부



-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비안네 신부가 본당 사제로 머무른 아르스 성당


 

“제가 만약 사제가 된다면 많은 영혼을 구하겠어요.”

눈이 움푹 들어간, 하지만 맑게 빛나는 파란 눈을 가진 열일곱 살 소년의 꿈은 오직 사제가 되는 것이었다. 어머니(요한 마리아)는 사제가 되겠다는 아들을 붙잡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1786년 5월 8일 프랑스 리용 인근의 한 농촌 마을에서 6남매의 넷째로 태어난 아들, 요한 마리아 비안네(John Mary Vianney)는 자라는 동안 여느 아이들과 특별히 다른 점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신심만큼은 남달랐다. 비안네가 일곱 살 때 성모상을 직접 자신의 손으로 만들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비안네는 신앙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3살 되던 해(1789년) 일어난 프랑스 대혁명 때문이다. 파리에선 가톨릭 성직자와 수도자들이 추방되었으며, 살해되는 사건까지 발생했다. 세상이 바뀐 것이다. 하느님께 기도를 올리려면 몸을 숨겨야 했던 시절이었다. 비안네가 13살이 되고 나서야 첫영성체를 할 수 있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 첫영성체도 물론 창문을 가린 방에서 해야 했다. 이런 생활은 1799년 나폴레옹의 등장과 그 후 1801년 정교 협약을 거치고 나서야 조금씩 완화되기 시작했다.

어머니에게 성소의 꿈을 이야기한 그 이듬해, 열여덟 살의 비안네는 인근 본당 발레 신부의 지도를 받으며 사제직을 위한 공부를 시작했다. 위대한 인물에게는 늘 위대한 스승이 있듯, 비안네에게는 발레 신부가 있었다.

하지만 초창기의 비안네는 발레 신부를 당황하게 했다. 어린 시절, 농사일만 배운 비안네는 기초 교육이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처음부터 다시 가르쳐야 했다. 자국어였던 프랑스어의 문법조차 제대로 몰랐으니, 당시 신학을 배우기 위해서는 필수였던 라틴어는 더욱 몰랐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마티아라는 학생이 비안네의 라틴어 공부를 도와주고 있었다. 마티아는 속에서 불이 났다. 다른 친구들은 조금만 도와주면 번역할 수 있는 간단한 문장을 비안네는 아무리 노력해도 알아듣지 못했다. “이런 멍청이~.” 결국 마티아는 화를 참지 못한 나머지 비안네의 뺨을 때렸다. 마티아는 비안네보다 여덟 살이나 어렸다. 비안네의 몸은 어린 시절부터 농사일로 다져온 건장한 몸이다. 힘도 당연히 더 셌다. 그런데 비안네는 여덟 살 어린 소년 앞에서 자신의 부족함을 겸손히 인정한다. 그리고 진심으로 용서를 빌었다. 마티아와 비안네는 이후 평생 동안 돈독한 우정을 나누게 된다.

발레 신부는 뛰어난 성덕과 신심을 가진 비안네가 학업 때문에 성소의 꽃을 피우지 못할까 걱정했다. 그런 발레 신부에게 비안네는 자주 이렇게 말했다. “신부님, 저 집으로 돌아가겠습니다.” 발레 신부에게 짐이 되는 것이 부담스러웠던 것이다. 하지만 발레 신부는 이렇게 말했다. “그러면 우리의 모든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는 거야. 사제품. 영혼들의 구원도 끝나는 거지.”

하지만 피나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비안네의 공부에는 진전이 없었다. 그런 비안네가 발레 신부의 곁을 떠난다. 이제는 홀로서야 할 시점이 온 것이다. 하지만 공부 문제는 나폴레옹 황제의 징집으로 인한 병역 문제 이후, 1812년 소신학교 철학과정에 입학할 때까지 계속 비안네의 발목을 잡는다.

당시 신학교 시험은 교수와 학생들이 라틴어로 문답을 하는 방식이었다. 비안네는 시험 때마다 질문을 이해하지 못해 대답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입학 동기들은 그를 비웃었다. 사람들은 그를 ‘열등생’으로 낙인찍었다. 역설적으로 이 시절 비안네의 성모 공경 신심이 더욱 깊어진다. 어려운 학업을 극복하기 위해 비안네는 성모님께 자신을 봉헌하기로 서원한 것이다. 그리고 학업의 어려움 속에서 평생의 영적 동반자, 마르첼리노를 만나게 된다. 마르첼리노 샴파냐(마리아의 작은 형제회-마리스타교육수사회 창설자)도 역시 라틴어 때문에 고생하고 있었다.

하지만 현실은 역시 현실이었다. 비안네의 고민은 깊어갔다. 공부를 도저히 따라갈 자신이 없었다. 당시 비안네의 학년말 생활기록부에는 이렇게 기록돼 있다. ▲근면 : 좋다 ▲행실 : 좋다 ▲성격 : 좋다 ▲지식 : 나쁘다.

돌파구가 필요했다.


-드디어 사제가 되다.

비안네 신학생이 라틴어와의 전쟁을 치르며 끙끙대던 어느 날이었다. 신학교 영성지도 신부와 교수 신부들이 비안네 신학생을 불러 이렇게 말했다.

“자네는 신학교를 떠나는 것이 좋겠네.”

성령 안에서 충만한 삶을 살며 사제가 되기를 진심으로 갈망했던 비안네로서는 하늘이 무너지는 소리였다. 신학교 신부들은 비안네 신학생이 학업을 도저히 따라오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당시로선 라틴어를 모르면 철학과 신학의 정수를 접할 수 없었다. 따라서 비안네 신학생은 신학을 수학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인간적 욕심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이러한 상황에 처했을 때 반발할 수 있다. “나는 하느님을 사랑한다. 그래서 반드시 사제가 되어야 한다.”“당신들이 뭔데, 인간적 판단으로 나와 하느님의 관계를 떼어놓으려 하느냐.”

하지만 비안네 신학생은 아무런 원망도 하지 않고 신학교를 떠난다. 순종한 것이다. 모든 것이 끝났다. ‘난 정말 사제가 될 수 없는 것일까.’

그토록 원하던 사제의 길은 이제 포기해야 했다. 그 고통과 회한은 고향으로 돌아와 자신의 영적 스승인 발레 신부의 품 안에서 폭발한다. 엉엉 울었다. 발레 신부는 목 놓아 우는 비안네의 등을 토닥였다. 그리고 말했다. “우리 다시 시작하자. 넌 사제가 될 수 있어.” 눈물 가득한 눈으로 발레 신부를 올려보는 비안네의 눈이 반짝였다.

발레 신부는 이후 비안네의 개인 교수를 자처하고 직접 가르쳤다. 비안네의 눈높이에 맞춰, 라틴어가 아닌 영성 신학 중심으로 가르쳤다. 비안네도 성심껏 공부에 매달렸다. 대부분의 영화와 드라마는 이쯤에서 극적인 반전(비안네의 사제서품)으로 이어지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3개월 후 비안네는 발레 신부와 함께 다시 대신학교를 찾아 졸업시험을 보지만, 결과는 낙방이었다. 발레 신부도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발레 신부는 마지막 선택을 한다. 주교(리옹 교구장)를 찾아간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비안네에게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십시오. 놓치기 아까운 사람입니다. 하느님께서 비안네를 사랑한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는 꼭 사제가 되어야 할 사람입니다.”

주교는 발레 신부의 계속되는 청에 못 이겨 감독관 2명을 비안네에게 보낸다. 사제가 될 수 있는 자질을 갖추고 있는지 아닌지 확인해 오라는 것이었다. 어쩌면 감독관 파견은 비안네에 대해 부정적인 주교의 심정을 드러내는 것인지도 모른다. 발레 신부의 정성어린 탄원을 받아들일 마음이 있었다면 별도로 감독관을 보낼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주교는 아마도 감독관이 “비안네는 역시 사제가 되기 힘들 것 같습니다”라는 보고서를 원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발레 신부의 사제관으로 와서 비안네를 직접 만나고 시험을 치른 감독관들은 전혀 다른 보고서를 주교에게 제출했다.

“요한 마리아는 대부분의 시골본당 신부만큼은 알고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오히려 그들보다도 더 많이 알고 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감독관이 비안네에게 내어준 시험지는 라틴어가 아니라 프랑스어로 된 것이었다. 신학교 시험이 라틴어로 치러지는 탓에 그동안 비안네는 한 번도 자신의 실력을 드러낼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감독관의 보고서를 받고도 주교는 일단 판단을 유보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갈 즈음, 비안네에게 결정적 사건이 발생한다. 교구 사목 책임자가 바뀐 것이다. 쿨봉 주교였다. 비안네의 운명은 그의 손에 달려 있었다. 비안네는 교구에서도 이미 공부 못하는 신학생으로 소문난, 유명 인사였다. 발레 신부는 다시 한 번 주교를 찾아갔다. 기대는 물론 하지 않았다.

그런데 쿨봉 주교가 의외의 질문을 한다. “비안네는 신심이 깊습니까?” 발레 신부를 비롯한 교구청의 사제들은 “공부는 못하지만, 신심은 깊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 말을 들은 쿨봉 주교가 한참동안 생각에 잠긴 후, 이렇게 말했다.

“그러면 나는 그를 사제로 부르겠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이 그의 부족함을 채워주실 것입니다.”

- 보좌신부 시절

1815년 8월 15일 성모승천대축일에 ‘성체의 성인’‘고해소의 성인’‘본당신부들의 수호 성인’의 씨앗이 뿌려졌다. 비안네가 보좌신부가 된 것이다. 29세의 나이였다. 오늘날에는 29세 혹은 30세 사제서품이 당연해 보이지만, 비안네 시절에는 동년배들보다 3~5년 늦은 서품이었다. 그만큼 비안네의 사제수품은 이례적이었다.

하지만 비안네는 아직 미완의 사제였다. 교구가 사제품은 인정했지만 고해성사 집전권을 유보한 것이다. 교구에선 아직도 그를 신뢰하지 못했다. 그래서 발레 신부는 비안네 신부의 고해성사 집전권을 위해 동분서주했다. 아름다운 영혼을 가진 비안네 신부가 하루라도 빨리 신자들의 영혼과 마주앉아 그들을 치유해 줄 것을 원했기 때문이다. 결국 1~2년 유보될 것으로 예상됐던 비안네 신부의 고해성사 문제는 발레 신부의 노력으로 의외로 수개월 만에 해결될 수 있었다.

첫 고해자는 발레 신부였다. 발레 신부가 비안네 신부 앞에서 무릎을 꿇고 고해를 하는 그 감격스런 모습은 20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지금도 마음을 찡하게 한다. 발레 신부는 모든 사람이 “포기하라”고 했지만, 비안네 신부의 성덕을 믿었다. 그리고 가르쳐도 알아듣지 못하는 ‘속 터지는 제자’를 끝까지 믿고 이끌었다. 발레 신부가 없었다면 비안네 신부도 없었다. 그만큼 비안네 신부의 첫 고해자를 자청한 발레 신부의 심정은 상상하는 것이 어렵지 않다. 고해성사를 마친 뒤, 두 사람은 아마도 “이제서야 하느님의 뜻이 우리 안에서 이뤄졌다”고 감격해 했을 것이다. 함께 무릎을 꿇고 십자가 앞에서 오랜 시간 기도를 했을 것이다. 포옹하고 울었을지도 모른다.

비안네 신부가 아름다운 영혼을 소유했고, 또 신심이 깊다는 소문은 이미 사제가 되기 전부터 인근 지방에 널리 퍼져 있었다. 그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은 비안네 신부의 고해소 앞에 줄을 지어 섰다. 비안네 신부는 소위 ‘인기짱 보좌신부’였다.

교리교육에 대해서는 두말할 필요도 없다. 비안네 자신이 공부 때문에 얼마나 힘들어 했는가. 당연히 비안네 신부는 더딘 학습 진도를 보이는 학생들을 한없는 인내와 온화함으로 대했다. 강론도 짧고 명쾌했다. 말과 글은 원래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을 잘 모를 때, 길고 장황해지는 법이다. 완벽하게 소화한 내용은 쉽고 명쾌해 진다.

비안네는 가난했다. 얼마 되지 않는 월급 대부분을 가난한 이들과 나눴다. 이런 일이 있었다. 비안네는 낡고 볼품없는 오래된 수단을 입고 있었다. 동료 사제들과 신자들은 시간이 날 때마다 “신부님, 수단이 낡았습니다. 제발 새 옷을 사서 입으세요”라고 말했다. 비안네는 주위의 강압에 밀려 어쩔 수 없이 어느 날 새 수단 하나를 장만했다. 그런데 그날 가난한 한 여인이 찾아와 도와달라고 했다. 비안네는 즉시 수단을 구입한 곳에 가서 돈을 돌려받아 여인에게 주었다. 비안네 성인 전기 작가들은 공통적으로 “비안네가 일생동안 새 수단을 입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비안네는 또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면서 공동체의 회심을 위해 자주 금식 고행을 했고 매일 긴 시간동안 성체 앞에서 기도했다. 이런 비안네를 신자들은 존경했다. 그래서 신자들은 단식 등 고행을 즐겨하는 비안네 신부에게 “몸을 돌보아야 한다”고 항의를 할 정도였다.

비안네는 행복했다. 사제로서 신자들과 함께 살아가며 하느님의 뜻을 실천한다는 사실에 크게 만족했다. 하지만 하느님은 늘 기쁨 뒤에는 슬픔을 주신다. 발레 신부가 하느님 품으로 떠날 때가 된 것이다. 영적 아버지의 최후를 지켜보는 것이 비안네에겐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다. 1817년 겨울, 66세의 발레 신부가 마지막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잘 있어! 용기를 내. 제단에서 나를 꼭 기억해 줘.”

발레 신부는 비안네를 정확히 보았고, 비안네를 가르쳤고, 사제직으로 인도했다. 비안네가 좌절할 때마다 발레 신부는 옆에 있었고, 비안네와 함께 걸었다. 이후 비안네는 매일 아침 미사를 드릴 때마다 발레 신부를 위해 기도했다.

비안네는 이제 혼자가 됐다. 3개월 후, 교구는 혼자가 된 비안네 신부를 본당 주임신부로 발령한다. 부임지는 ‘아르스’였다. 30km를 떨어진 곳이었다. 비안네는 짐마차에 옷 몇 벌과 발레 신부가 남긴 책들을 싣고 첫 부임지로 향했다. 1818년 2월 9일 이었다.

젊은 본당 주임 신부

이탈리아를 둘러본 배낭 여행객이 프랑스 남동부를 거쳐 파리로 가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도시가 있다. 바로 프랑스 제3의 도시, 리옹이다. 프랑스의 수도 파리의 위치를 서울에 비유한다면, 마르세유는 부산, 리옹은 대구 쯤 있다고 보면 된다. 오늘날 프랑스 축구리그의 ‘올림피크 리옹’으로 유명한 리옹은 기원전 로마의 군사 주둔지가 되면서 도시화됐다. 이후 13세기에는 공의회가 두 차례나 열릴 정도로 가톨릭교회로선 중요한 종교적 의미를 지닌 도시다.

비안네 신부가 첫 본당 주임 신부로 발령 받은 ‘아르스’는 이곳 리옹에서 북쪽으로 직선 거리로 25~30km 가량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다. 오늘날 서울대교구 명동대성당에서 수원교구 서호본당(수원시 권선구 서둔동)까지 가는 거리다. 서호본당은 특히 당시 아르스의 신자 수와 본당 재정 상태 등이 놀라울 정도로 흡사하다.

아르스는 가난한 농촌마을이었다. 주민 수는 240여 명에 불과했다. 성당도 오랫동안 관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낡은 상태였다. 마을 사람들의 신심은 깊지 않았다. 젊은이들 대부분이 성당에 나오지 않았고, 기본적 교리지식조차 몰랐다. 프랑스대혁명(1789년)이후 태어나고 자란, 젊은이들은 더 이상 신앙에 대해 목말라하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은 신앙보다도 향락에 더 친숙해 있었다. 거의 매일 밤마다 술을 마시고, 흥청거렸다. 주일미사도 어쩌다 한 번이었다. 첫영성체 이후, 영성체를 한 번도 하지 않은 남자들이 허다했다.

그러나 훗날 이 성당에서 기적이 일어난다. 유럽 전역에서 비안네 신부에게 고해성사를 청하기 위해 신자들이 몰려든다. 신자들은 비안네 신부의 옷자락이라도 만지기 위해 수천 킬로미터를 걸어서 아르스를 찾는다. 뒤에서 자세히 나올 내용이기 때문에 여기선 시골본당에 갓 부임한 볼품없는 외모의 한 젊은 사제 이야기로 다시 돌아간다.

사제관에 도착해 짐을 푼 비안네 신부는 마음이 무척 상했다. 낡고 초라한 성당에 비해 사제관이 화려했기 때문이다. 비안네는 사제관에 있는 가구들을 없애기 시작했다. 비단으로 감싼 의자와 두 개의 화려한 침대 및 이불까지 모두 가난한 이들에게 주었다. 남은 것은 나무 침대와 낡은 테이블, 옷장이 전부였다.

비안네 신부는 바로 ‘사목’에 착수한다. 매일 시간을 쪼개서 신자 가정을 방문했고, 신자들과 영적 담화를 나눴다. 특히 그는 강론에도 집중했다. 문장력이 서툰 그는 30~40쪽 분량의 강론 원고를 작성하기 위해 거의 매일 밤을 새웠다. 게다가 그는 강론 원고를 모두 암기했다. 신자들은 길을 걸으면서 강론 원고를 중얼거리며 외우는 비안네 신부의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다. 비안네 신부가 강론에서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하느님의 사랑이었다. 그는 이 사랑과 복음을 열정적으로 선포했다. 특히 비안네 신부는 성체를 자주 영하라고 권고했다.

“성체를 모십시오. 예수님께로 가십시오. 여러분이 예수님을 위한 삶을 살기 바랍니다. 너무 바쁘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은 수고하고 지친 자들을 쉬도록 초대하십니다.”

“영혼은 하느님과 함께해야만 살 수 있습니다. 하느님만이 우리 영혼을 채우실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느님이 필요합니다. 모든 가정에 식료품을 잘 보관하기 위한 저장실이 있습니다. 감실은 우리 모두의 저장실입니다.”

하지만 신자들의 반응은 냉랭했다. “잠시 저러다 말겠지”였다. “즐기면서 편안하게 살려 했는데, 꽉 막힌 신부님이 마을에 오셔서 골치 아프게 생겼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마을 사람들의 마음은 아직 열리지 않았다.

그러나 비안네는 포기하지 않았다. 자신의 소명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좌절의 벽에 부딪힐 때마다 그는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또 사제의 길을 제대로 걷기 위해 잠을 자지 않고, 식사도 줄이는 등 고행도 마다하지 않았다. 늘 죄를 멀리 했으며, 하느님과 기도 안에서 살려고 노력했다.

비안네 신부의 일화를 조사하던 중, 감동적인 장면을 발견했다. 비안네 신부가 얼마나 성체 안에서 그리스도와 일치하는 삶을 살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일화다. 아르스의 한 마을 이장이 새벽 아침 일찍 일어나 산책로를 걷고 있었다. 멀리 비안네 신부가 보였다. ‘신부님이 이 시간에 웬일이지?’ 이장이 다가갔다. 비안네는 무릎을 꿇고 하늘을 향해 외치고 있었다. 그는 울고 있었다.

“오, 나의 하느님, 저희 본당 신자들이 회개하게 하소서. 당신을 따르게 하소서.”

비안네 신부는 헌신적으로 사목에 임했다. 신자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대화를 하고 고해성사를 주고, 강론을 했다. 그는 솔직하게 자신을 드러냈으며, 온힘을 다해 악을 물리치고 선을 행할 것을 가르쳤다. 비안네 신부는 자주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 지방의 온화한 기후가 나를 괴롭힙니다. 나는 일도 너무 적게 하고 편하게 지내니 지옥에 떨어질까 항상 걱정됩니다.” 그 결과는 금방 나타났다. 부자였던 한 귀족 신자는 이렇게 말했다. “이 겸손한 사제는 진주같이 귀한 사람이다. 이분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라면 내 재산의 절반이라도 내 놓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은 열심한 신자들만 비안네 신부에게 영향을 받았을 뿐이다. 쉬는 신자들이 문제였다. 아르스 마을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신심이 깊지 않았고, 기본적 교리조차 모르는 쉬는 신자가 허다했다. 마을에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축제가 열렸고, 사람들은 그때마다 퇴폐적인 춤과 술에 빠져 살았다.

비안네 신부는 이 같은 풍습을 몰아내기 위해 노력했다. 오직 하느님의 사랑이 살아 숨 쉬는 마을을 만들기 위해 열정적으로 노력했다. 그가 얼마나 마을 사람들에게 강도 높게 하느님 사랑을 선포했는지는 다음의 미사 강론에서 잘 알 수 있다.

“우리는 신앙이 없습니다. 우리는 장님입니다. 나의 형제들이여. 조금 후 우리 주님(성체)을 들어 올릴 때 여러분은 그분께 여러분들의 눈을 열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십시오. 그분은 은총을 누구에게 선물할지 찾고 계시지만 아무도 그 은혜를 구하는 이가 없습니다.”

이렇게 비안네 신부는 새벽 4시부터 기도와 성체조배, 미사 봉헌, 고해성사 등으로 하루 중 10시간 이상 성당과 고해소에서 지내며 열성적으로 사목에 임했다. 틈틈이 가정과 환자 방문, 강론 및 교리 강좌 준비도 하였다. 주민들은 감동을 받았고, 몇 년 후 아르스본당은 그가 부임하던 당시와는 전혀 다른 모습의 공동체가 되었다.

비안네 신부는 병자를 방문하는 일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아픈 사람이 있으면 아무리 거리가 멀고 시간이 많이 걸려도 꼭 방문했다. 한 번은 자신의 몸이 몹시 아픈데도 병자를 찾아갔다가 그 집에 도착하자마자 침대에 누워서 병자의 고해를 들어야 했다. 아픈 사람이 아픈 사람을 위해 성사를 집전한 것이다.

성사에 대한 비안네 신부의 이러한 열정이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 것은 1823년이다. 비안네 신부가 36세 되던 그 해, 인근 지역에서 대규모 피정이 열렸다. 많은 사람들이 몰리는 만큼 고해성사를 줄 사제가 부족했다. 결국 비안네 신부에게도 고해성사를 도와달라는 요청이 왔다. 한겨울에 9km를 왕복하며 이뤄진 고해성사는 고행성사였지만 그는 자신의 모든 열정을 바쳤다. 이때 고해자들은 비안네 신부를 통해 죄사함의 큰 은혜를 느꼈고, 그 고해자들의 입을 통해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당시 몇 주일 동안 계속된 피정에서 비안네 신부의 고해소는 늘 신자들로 붐볐다고 한다. 밀려드는 신자들로 인해 고해소가 넘어져 부서질 정도였다. 비안네 신부는 고해소에서 나오지 못했다. 한 번은 한 신자가 비안네 신부를 쉬게 하기 위해 고해소로 갔지만 엄청난 인파가 몰려있는 것을 보고 발길을 돌려야 했다. 자정에 찾아가도, 새벽 2시에 다시 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할 수 없이 이 신자는 완력으로 신자들 사이를 헤치고 들어가 고해소 문을 열고 신부를 모시고 나올 수 있었다.

이후 비안네 신부는 선종할 때까지 14년 동안 찾아오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고해성사를 주기 위해 하루 12시간 이상씩 봉사했다. 본당 신부들도 서로 비안네 신부를 모시겠다고 말다툼을 벌였을 정도였다. 아르스 마을 기록에 따르면 1834년 한 해 동안만 해도 순례자가 3만명에 달했다. 비안네 신부가 고해소를 나갈 때는 밀어닥치는 군중을 피해 보호를 받아야만 했다. 어떤 이들은 비안네 신부의 수단자락을 끌어당기고, 어떤 이들은 또 옷을 찢기까지 했다. 하지만 비안네 신부는 그들을 전혀 원망하거나 불편해 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정성스럽게 고해성사에 임했다.

여기서 50대 비안네 신부의 하루 일과를 보자. 그는 대체로 자정과 새벽 1시경에 고해소로 갔다. 그리고 새벽 6시 혹은 7시에 고해소에서 나와 미사를 봉헌했다. 미사 후 간단한 식사를 마친 후 다시 고해소에 들어간 비안네 신부는 오전 10시쯤 다시 나와 성무일도 기도를 바쳤다. 11시에 교리를 가르치고 성당에서 나와 사제관에 가서 각지에서 온 편지를 읽고 점심을 먹는다. 점심식사를 마친 후에는 다시 고해소로 향했다. 다시 고해소에서 나오는 시간은 저녁 7시 혹은 8시. 이후 비안네 신부는 묵주기도와 저녁기도를 바치고, 강론대로 올라가 강론을 한다. 강론을 마친 후 약 9시 경, 비안네 신부는 비로소 혼자가 된다. 이 시간을 이용해 그는 아침기도를 외우고, 영적 독서를 했다. 그리고 잠자리에 들었다. 이렇게 그는 선종할 때까지 하루 평균 2~3시간의 수면밖에 취하지 못했다.

농부의 아들, 비안네 신부는 튼튼한 몸을 타고 났지만 이러한 엄격한 수덕생활과 충실한 사도직 업무 그리고 끊임없는 순례자들의 방문으로 과로하게 되어 점점 쇠약해졌다.

73세가 되던 1856년 6월, 비안네는 성체를 모시고 갈 힘도 없었지만 평소대로 고해소에서 16시간을 보냈고, 교리를 가르쳤고, 기도를 바쳤다. 사제관으로 돌아온 그는 의자에 쓰러지며 말했다. “저는 더 이상 못합니다.”

2개월 후인 8월 2일, 비안네 신부는 폭염이 유난히 기승을 부리던 그날 마지막 성체를 모셨다. 마을은 울음과 기도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남자들은 비안네 신부의 마지막 길을 시원하게 해 준다며, 사제관 지붕에 계속 찬물을 길어 쏟아 부었다.

그리고 8월 4일 새벽 2시, 41년 5개월 동안 작은 시골 본당의 주임 신부였던 비안네 신부는 하느님께 영혼을 돌려 드리고 그토록 소망하던 영원한 잠에 들었다. 그가 이 땅에서의 여행을 마치고 하늘로 오르던 날, 아르스 마을 사람 모두가 울었다.

비안네 신부 선종 후 1861년, 파리에서 비안네 신부의 전기가 출간된다. 비안네 신부를 늘 옆에서 지켜보았던 몬냉 신부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수많은 관련자 증언 및 자료들을 모은 방대한 책이다. 비안네 신부의 삶과 영성은 이 책을 통해 전 유럽과 세계로 퍼져나갔다.

몬냉 신부의 책을 읽다 보면 우리가 비안네 성인에 대해 몰라도 너무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알고 있어도 너무 단편적 내용들만 알고 있었다. 비안네는 단순히 ‘고해성사의 달인’이 아니었다.

-초자연적 신비를 체험한 성인

비안네 신부는 뛰어난 영성가였다. 매일 밤 사탄의 목소리를 듣고, 피나는 영적 싸움을 했다. 몬냉 신부의 책에 의하면 그래서 비안네 신부는 보이지 않는 현상에 무감각한 세태에 대해 늘 아쉬워했다고 한다. 비안네가 살던 당시는 계몽주의가 유행한 시기였다. 18세기 유럽에선 신앙이 폐기되었으며 그 대안으로 이성이 대두되고 있었다.

비안네 신부는 그래서 보이지 않는 현상에 대해서는 아예 입을 닫아버리는 신학자들을 볼 때마다 탄식했다. “열심히, 착하게 잘 살기만 하면 되지”라고 생각하는 신앙인들에게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초자연적 현상들을 매일 접하다 보니, 초자연적 현상을 믿지 않는 이들이 안타까워 보였던 것이다. 비안네는 자주 이렇게 말하곤 했다.

“초자연적 사건에 대해서 감수성이 너무 무뎌져서, 우리는 막상 초자연적 현상이 발생했을 때 이를 믿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예수의 기적을 직접 접했던 유대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았던 것처럼, 우리도 기적을 매일 체험하면서도 막상 마음이 닫혀 그 기적을 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비안네의 신앙은 강한 체험에 바탕하고 있었다. 눈으로 보고, 피부로 느끼고, 귀로 듣는 체험이 강렬하다 보니 신앙도 그만큼 강해졌고, 그 강한 신앙이 삶으로 배어나온 것이다.

그래서 비안네 신부는 평소 강론시간에 자신이 직접 경험한 사탄에 대해 자주 이야기했다. 그는 특히 “사탄은 아주 영리합니다”라고 자주 말하곤 했다. 이런 말도 했다. “그러나 사탄은 강하지 않습니다. 성호 한 번만 그으면 도망갑니다.”

신앙 체험이 강렬해지면서 비안네 신부의 기이한 영적 능력도 함께 나타났다. 성인들에게서만 보이는 놀라운 능력이 그에게서도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비안네 신부는 고해자의 말을 다 듣지 않고도 그들의 질문에 대답해 줄 수 있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이 사실을 기적이라고 불렀고, 이는 비안네 신부가 훗날 성인이 되는데 결정적 증거 자료가 된다. 어느 날 한 젊은 청년이 비안네 신부를 시험하기 위해 회개하지도 않고 거짓 고해를 했다. 눈물 연기도 동반했음은 물론이다. 그런데 고해를 듣던 비안네 신부가 등을 돌렸다. 그리고 말했다. “회개하고 다시 찾아오세요.” 비안네 신부는 청년의 마음을 읽었던 것이다. 놀란 청년이 그 자리에서 회개하고, 비안네 신부 앞에 무릎 꿇고 제대로 된 고해성사를 보았음은 물론이다.

-자연과 가난을 사랑한 성인

비안네 신부는 여유가 생길 때마다(하루 10시간 이상의 고해성사와 새벽 2시까지 이어지는 강론 준비 등으로 여유가 있었는지도 의심스럽지만) 묵주를 들고 혼자 산책하면서 기도했다. 그는 그 산책 시간을 사랑했다. 프란치스코 성인처럼 자연을 사랑했다.

비안네 신부의 자연사랑은 오늘날 우리들이 자연을 사랑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오늘날 도시에서 생활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연의 싱그러움을 사랑한다. 도심을 조금만 벗어나도 행복해 한다. 하지만 비안네 신부는 소음 가득한 도시에서 탈출할 때 느끼는 그런 해방감으로 자연을 사랑한 것이 아니었다. 눈만 뜨면 보이는, 어쩌면 식상할 수도 있는 그 자연 속에서 하느님의 창조물인 자연을 사랑한 것이다. 비안네 신부는 그래서 신자들에게 자주 대자연에 대한 자신만의 명상을 전했다.

비안네 신부는 또한 철저히 가난을 몸으로 살았다. 2~3일 동안 아무런 음식을 먹지 않을 때도 많았다. 편안한 잠자리를 거부하고 침대 속의 짚을 일부러 뺐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회개와 성체성사를 강조한 성인

비안네 신부는 신자들에게 성체를 자주 모시라고 권고했다. “성체를 모십시오. 내 형제들이여 예수님께로 가십시오. 여러분이 예수님을 위한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우리도 그분 덕택에 살고 있습니다. 너무 바쁘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신성한 구세주께서는 ‘내게로 오너라. 수고하고 지친 자들아 내게로 오너라. 내 너희를 쉬게 하겠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초대를 거절하지 마십시오. 죄가 너무 커서 초대에 응할 수 없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사실대로 말하자면 여러분은 합당치 않습니다. 물론 우리는 죄인입니다. 하지만 죄가 너무 많아서 주님께 나아갈 용기가 없다고 말해선 안 됩니다. 몸이 아픈데 치료를 거부하거나 의사를 부르지 않겠다고 말할 수 없지 않습니까?”

비안네 신부는 또 이렇게 말했다. “어떤 사람이 큰 장작더미를 차곡차곡 쌓으며 ‘나를 태울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한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우리는 죄를 범하며 이런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지옥에 내던지시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가 스스로 그렇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한 성인

비안네 성인은 이렇게 말했다. “사람은 모든 것을 사랑하는 하느님께 바쳐야 합니다. 일, 걸음걸이, 잠 등 그 밖의 모든 것을 그분께 봉헌하지 않으면 잃어버리게 됩니다. 하느님과 함께 한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 일입니까. 그분이 모든 것을 지켜보시고 모든 것을 용서하신다고 생각하며, 아침마다 이렇게 기도합시다. ‘모든 일이 당신 마음에 드시도록 제가 하는 모든 일에 당신이 함께해 주십시오.’ 우리들의 영혼에게 하느님은 얼마나 많은 위로를 줍니까. 영혼과 하느님 둘은 절친한 친구와 같습니다.”

우광호 기자 ( woo@catimes.kr )


요안나   09-08-05 00:02
좋은 자료 도움이 되었습니다.
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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