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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악습을 몰아내는 덕행 -
  ۾ : 테아     ¥ : 09-07-31 20:22     ȸ : 2567     Ʈ ּ
악습을 몰아내는 덕행

* 사랑과 지혜가 있는 곳에 두려움도 무지도 없습니다.

* 인내와 겸손이 있는 곳에 분노도 흥분도 없습니다.

* 기쁨과 더불어 가난이 있는 곳에 탐욕도 욕심도 없습니다.

*고요와 묵상이 있는 곳에 근심도 분심도 없습니다.

* "자기 집을 지키기 위하여"(루가 11,21) 
    주님께 대한 경외심이 있는 곳에 원수가 침입할 틈이 없습니다.

* 자비심과 깊은 사려가 있는 곳에 경박도 고집도 없습니다.







 
[성지를 찾아서] 해외성지 ⑫ - 아씨시 프란치스코 대성당

기독교는 아시아(중동)에서 탄생하고, 유럽과 남미에서 꽃을 피웠다.
이탈리아 중부 움브리아 지방에 있는 아씨시는 ‘빈자들의 친구’ 프란치스코 성인과 글라라 성녀가 살고, 죽고, 묻힌 곳이다.
오직 자신을 평화의 도구로 써 주기를 간절히 바랐던 프란치스코 성인과 글라라 성녀의 숨결이 배어 있어서인지
아씨시는 도시 전체가 수도원 같다. 공장 굴뚝이라고는 보이지 않는다.
버스에서 내려 성지를 찾아 올라가는 언덕길에도 성물과 선물을 파는 구멍가게만 있을 뿐, 유흥업소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다.
저녁 시간만 지나면 아씨시는 고요한 신비로 물드는 신앙의 도시이자 평화의 안식처이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청빈한 삶과
오직 그리스도를 따르는 순명과
자유가 지나친 세속화로 빛을 잃고 무너져가던 중세 교회를 다시 일으켜세운
그곳이 바로 성지 아씨시이다.

◈ 죽음을 넘어 새생명 이뤄낸 아씨시 프란치스코 대성당
 
프란치스코 성인과 글라라 성녀가 태어났고 또한 묻힌 아씨시를 찾으면
맨 먼저 비둘기의 형상으로 오는 성령 상징물(사진 1)이 순례객들을 맞아준다.
성지를 찾아가다 보면 일반인보다 밤색 혹은 검은색 수도복을 입은
프란치스코 수도회 신부나 수녀들의 모습을 더 자주 보게 된다.
다른 산업적인 기반은 하나도 없지만 자연 속에 성지보존만으로
전세계에서 연간 수백만 명이 찾아드는 ‘신앙도시 아씨시’ 의 언덕길을 올라서면
돌로 된 거대한 성당을 만나게 된다.
바로 프란치스코 수도원과 프란치스코 대성당이다.
중세 고딕 예술의 전형을 보여주는 프란치스코 대성당은 아랫성당과 윗성당이 포개진 모습이다.
아랫성당에는 프란치스코 성인의 유해와 석관,
그리고 성인의 삶과 수도생활의 영적인 사건을 담은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
2층 성당에는 지오토의 유명한 ‘성 프란치스코의 생애’를 담은 28폭짜리 프레스코화가 있다.
원래 프란치스코 대성당은 아씨시 외곽, 모든 사람이 다 기피하던 ‘죽음의 언덕’에 자리 잡았다.
‘죽음의 언덕’에 프란치스코 대성당이 자리 잡게 된 것은 성인의 유언 때문이다.
평생 누더기 한 벌만 걸치고 가난하게 살며, 그리스도를 따른 프란치스코 성인은
예수님이 해골산(골고타 혹은 갈바리아)에서 돌아가시고 묻힘으로써 새생명을 피워냈듯이,
버려진 ‘죽음의 언덕’에 비천하게 묻히기를 원했다.
프란치스코 성인이 묻히면서 ‘죽음의 언덕’ 은 죽음을 넘어 무너져가는 교회를 살려내는 기적을 이루게 되었다.
 
◈ 평화의 도구 프란치스코 성인의 생애 다룬 프레스코화
 
지옥의 땅을 성지로 변모시킨 프란치스코 대성당(레 바실리케)은
절도있게 큰 규모로 지은 아랫성당(바실리카 인페리오레),
마치 환희와 자비의 세계를 표현하듯이 광대하게 지은 2층 성당 등으로 되어있다.
2층 성당에는 프란치스코 성인의 생애를 담은 프레스코화 28폭이 있다.
아랫성당에는 프란치스코 성인의 묘와 그리스도의 탄생, 유아대학살, 프란체스코의 죽음 등을 다룬 프레스코화가 있다.
프란치스코 대성당 내부의 그림은 이탈리아 회화의 새로운 세계를 개척했다는 평가를 얻을 정도여서
이곳에서는 믿음과 예술을 동시에 느낄 수 있다. 유네스코에서 이 그림들을 관리하고 있다.
그러나 지난 1997년에 엄청난 지진 피해를 입었다.
당시 대성당의 일부가 무너지면서 지오또가 그린 그림의 일부가 유실되기도 했으며,
무너진 천장에 깔려서 2명의 순례객과 수사가 즉사하기도 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이곳을 순례하면서 “프란치스코 성인을 알든 모르든 평화를 느낄 수 있는 곳”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성 프란치스코 성당의 복도에는 한 쌍의 흰 비둘기가 살고 있다.
이 흰 비둘기는 어찌된 일인지 바깥으로 날아가지 않고, 프란치스코 대성당을 지키며 복도에서 살고 있다.
또한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의 장미정원에는 가시가 없는 장미가 자라고 있다.
바깥에서 가시돋은 장미를 이곳에 옮겨심어 놓으면 가시가 없어지고,
이곳의 장미를 외부로 옮겨심으면 가시가 새로 돋아난다.
프란치스코 성인인 인간적인 육정을 느껴 가시돋은 장미밭을 뒹굴자 하느님이 감싸주었다는 얘기가 서려있는 곳이다.
자연을 찬미하며, 새와 양 바람과도 대화를 나눈 평화의 사도 프란치스코를 기린 동상 등이 서있기도 있다.
 
◈ 다미아노 십자가에서 무너져가는 교회 세우라는 계시
 
프란치스코 성인은 1182년 아씨시에서 대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젊은 시절에는 아씨시 청년들의 우두머리이던 프란치스코가 아씨시와 페루지아 간에 벌어진 싸움에서
포로로 잡혀 병으로 눕게 되면서 마음에 커다란 동요를 일으켰다.
그러나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지 못하고 다시 기사가 되려고 군에 입대하였다.
어느날 밤, 환시와 함께 첫 번째 계시를 들었다.

“프란치스코야, 왜 주인을 섬기지 않고 종을 섬기려 하느냐? 집으로 돌아가라. 네가 할 일을 알려주겠다.”
자신이 할 일이 무엇인지 찾으며, 폐허가 된 다미아노 소성당에서 기도를 드리고 있을 때, 두 번째 계시를 들었다.
"프란치스코야, 가서 허물어져 가는 나의 집을 고쳐 세워라."
프란치스코는 십자고상에서 들려온 계시가 지시하는 ‘고쳐 세워야할 집’이 지나친 세속화로 외면받는 교회라고 알아차렸다.
무너져가는 교회를 살리라는 특명을 받은 프란치스코는 우선 집에 돌아가 귀중품을 팔아서 성당에 내어놓았다.
이 사실을 안 아버지는 노발대발했다. 그러나 프란치스코의 뜻은 완강했다.
가난한 이들에게 재산을 계속 나누어주었다. 분노한 아버지는 아들에게 재산포기권을 강요했다.
프란치스코는 거부하지 않고 기꺼이 응하였다. 입던 옷까지 다 벗어주고 알몸이 되었다.
비로소 세간에서 얘기하는 ‘거지 성인’ 곧 ‘빈자(貧者)들의 성인’이 되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거지를 욕하는 자는, 모든 가난한 이들이 지닌 그리스도를 모욕하는 것이다."고 말하며
“전대에 돈을 넣고 다니지 말며, 식량자루나 여벌옷도 지니고 다니지 말라.”는 철저한 청빈생활로 일관했다.
프란치스코는 그리스도의 수난을 묵상할 때 예수님처럼 오상(五傷)을 받았다.
 
◈ 교황도 프란치스코와 똑같은 꿈 꿔
 
프란치스코의 청빈과 무소유의 생활에 감화를 받은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들어 12명의 제자를 두게 되었고,
프란치스코를 따르는 글라라도 여자수도회를 만들었다.
교황 인노센트 3세(1198-1216)는 “무너져가는 교회를 세워라.”는 계시를 받은
프란치스코와 똑같은 꿈을 꾸고, 프란치스코 수도회를 인가했다.
그 뒤 프란치스코회는 작은 형제회, 곤벤뚜알 프란치스코회, 카푸치노회로 나눠져서 일하고
복음대로 청빈한 삶을 따르며 수도하고 있다.
예수님처럼 오상을 받은 프란치스코는
1226년 10월 3일 죽음이 임박하자 십자가상 그리스도와 같이 완전한 가난 중에 임종을 맞이하고 싶어서
맨땅에 누워서 최후를 맞았고, 사후 2년 만에 시성되었다.
당신을 평화의 도구로 써달라며, 태양의 찬가를 불렀던
프란치스코 성인의 청빈한 정신이 다시금 필요해지는 시기이다.
 
[매일신문, 2007년 4월 12일, 글·사진 아씨시에서 최미화기자]
♬ 하느님은 사랑이에요


요안나   09-08-01 00:08
성지순례길에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이었답니다.
그곳에서의 미사참례가 너무 감동적이었구요.
빈자의 성인을 생각하며
너무 많이 소유하고 있는 나의 욕심을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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