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경의 치유
육체의 고통을 치유하는 내용의 복음 말씀들은 하나같이 예수께서 영적 차원에서 제공해 주신 내적 변화를 지적하고 있다. 그 같은 치유가 없으면 사람은 영적으로 소경이 되고 하느님 말씀에 귀머거리가 된다.
우리는 그저 피상적인 차원의 실재만을 보고, 귀에 들리는 소리만을 듣는다. 그리고 실재의 내적인 본질과 전례의 상징들 속에 깃들인 신비를 감지해 내는 직관의 기능들도 둔해진다. 삼라만상에 담긴 궁극적인 메시지는 인식하지 못한 탓에 누리지 못하고 사물의 외적인 차원에만 매달린다.
바로 이런 근본 문제를 치유하기 위해 마련된 것이 종교의식들이다. 예수의 제자들은 우리처럼 많은 결함을 안고 있었다.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필립보가 예수께, 공생활 내내 줄곧 이야기하신 아빠,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하자 예수께서는 그러한 요구에 꽤나 어리둥절해하다가 대답하셨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같이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보았으면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다.” 여기에서 ‘본다’는 것은 육체의 눈으로 본다는 말이 아님은 확실하다.
신앙의 눈으로만 살갗과 뼈로 된 표피 그 너머에 있는 진실을 볼 수 있다. 우리는 인간의 개성과 윤리적 배경, 국적, 생활양식 또는 종교적 투신에 매달린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그 사람의 아름다움 자체를 보는 데 걸림돌이 된다. 제자들은 또한 제대로 들을 줄도 몰랐다. 예수께서는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들어라!”는 말씀을 몇 번이고 되풀이하셨다. 이는 그들이 당신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긴 하지만 그 말씀이 가리켜 보이는 내적 실재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있음을 의미한다.
소경은 구걸하다가 나자렛 예수의 소문을 들었다. 그러다가 예수께서 군중을 이끌고 지나가신다는 것을 알고 소리치기 시작한다. 예수께서는 그 고함소리를 듣고 말씀하신다. “그를 불러오너라.” 부름 받는다는 감각작용은 순수한 관심이 동기가 되어 다른 사람들을 섬기고 영적 여정에 이끌림으로써 우리의 체험으로 전환된다. 기본적인 인간 가치들은 누구에게나 잠재되어 있고, 또 신앙의 눈으로 보거나 희망의 귀로 들을 때 촉진될 수 있는 참된 행복을 갈망한다.
영적 깨달음은 영적 감각과 관련해 이야기할 수 있다. 복음에서 예수께서 병자를 치유하실 때 그분이 영적인 장님, 절름발이, 벙어리 또는 귀머거리들을 치유하고 계신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악마를 쫓아냄은 사람들이 탐욕과 충동에서 벗어나게 함을 나타낸다. 그 당시 나병은 곧 죽음을 의미한 만큼 나병의 치유는 거짓된 자아를 낫게 하는 치유를 상징했다. 실제로 나병에 걸렸다는 것은 육체적으로는 살아있을망정 사회적으로는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영적 감각들이 드러나는 최초의 징후는 하느님께로 이끌리는 것이다. 이것은 그저 하느님과 조용히 차분하게 홀로 있고자 하는 바람일 수도 있다. 하느님에 관해 생각하거나 그저 하느님께 말씀을 드리는 것으로는 만족하지 않는 일정한 불만이다. 예수께서는 “하늘나라가 다가왔다.”고 말씀하셨다. 이 지혜의 말씀을 영적인 의미로 해석하면 하느님의 현존을 감지하는 내적 감각을 가리킨다. 이것은 하느님을 느끼지 못한다는 이유 때문에 하느님이 멀리 계신다는 엄청난 환상을 몰아낸다.
촉각은 보다 발달된 영적 감각이요, 하느님께서 실제로 우리와 얼마나 가까이 계시는지를 감지하는 뛰어난 통찰력이다.
“하늘나라가 너희 안에 있다.”는 말은 미각(味覺)과도 부합된다. 이 같은 영적 감각은 하느님이 그저 우리와 가까이 계시는 정도가 아니라 우리가 그분 안에 뿌리박고 있음을 감지한다. 우리가 먹는 음식은 섭취되어 우리 몸속에서 세포로 변화함으로써 우리 자신이 된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가 먹는 것이 바로 우리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초월적인 관계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세포요, 가장 심원한 차원에서 실재에 눈과 귀가 열린 새로운 인류이다.
영적인 후각은 하느님께로 향하는 이끌림을 상징하고, 촉각은 하느님과 가까움을 상징하며, 미각은 하느님과 합일을 상징한다. 우리가 신앙의 눈으로 보고 희망의 귀로 들을 때 복음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에 응답하는 셈이 된다. 이 같은 깨우침이 없으면 우리는 삶에 대한 피상적인 인상과 감정적인 반응에 끊임없이 흔들리게 된다. 영적 감각이 발달할 때 우리는 사물들을 하느님의 관점에서 평가하는 신적 지혜를 직접 대하게 된다.
영적 감각들은 그것이 지니는 직접적 효과 때문에 신체적인 감각들과 흡사하다. 이 감각들은 신체의 감각들이 아닌 삼라만상의 큰 가치들을 직접 감지하는 직관적인 기능들을 통해 실재와 접촉하게 한다. 이들은 관상기도를 통해 점진적으로 깨어날 수 있다. 영적 감각들을 일깨우는 일은 신앙의 눈으로 보라는 복음의 부르심이다. 영적 감각들이 활성화될 때 우리는 진실로 듣게 되고 보게 된다. 즉 실재의 핵심으로 통하는 흡수기관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믿음과 희망과 사랑을 통해 우리는 우주의 궁극적인 메시지를 듣는다. 이 같은 깨우침의 결과는 시력을 찾은 소경이 취하는 행동으로 상징되고 있다. 그는 그분을 따라 나섰다. 예수께서는 그를 치유한 것이 무엇인지를 강조하고 계신다. 그것은 바로 믿음이었다! 이 믿음은 그저 이성을 통해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직관에 해당하는 신앙이었다. 예수께서는 그 소경에게 말씀하신다.
“평안히 가라.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 우리의 신앙, 그것은 우리를 부르고 어루만지고 변화시키시는 하느님과의 일치다.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되는 것, 그것이 바로 궁극적인 치유인 것이다.
- 깨달음의 길 1 - 에서
성 바오로딸 수도회 - 2001년 2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