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동생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 왔다
주님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며 부활을 기다리는 참회의 사순 기간이 벌써 4주째 접어들었습니다. 이번 사순 기간만은 내가 무언가 극기의 삶을 살아보리라 마음먹으신 분들도 많을 것이고 또 실패의 쓴잔을 마신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어떠한 결과에 연연하지 않고 우리 스스로가 변화되려고 노력하는 그 자체로 주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사랑해 주실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말씀은 우리가 자주 접하는 내용이면서 내가 어떠한 위치에서 보는가에 따라서 다양한 해석이 나올 수 있는 내용입니다. 아버지의 모습과 작은아들의 모습 그리고 큰아들의 모습 속에서 우리의 모습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작은아들을 용서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참 못마땅하게 생각한 적이 있었습니다. 용서 할 수는 있지만 그렇게 쉽게 용서해 주면 버릇이 나빠지고 다시 그렇게 잘못된 길로 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일단은 충분한 대가를 지불하고 그 후에 받아들이는 것이 맞지 않은가? 그래서 큰아들의 마음을 이해하고 그것이 옳다고 생각하면서 이 비유의 이야기는 실질적인 사실이 아닌 현실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그냥 이야기에 불과하다고 생각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작은아들의 모습이 곧 나의 모습일 수 있다고 생각하고 다시 이 글을 묵상 해 보았을 때는 너무도 다른 모습이 나오는 것입니다. 첫 번째 느껴지는 것은 하염없는 감사와 아버지의 사랑이 나의 행동에 대한 대가성 매질보다 더 아픔을 느꼈으며 그와 함께 감사함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형이 나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자신이 받는 이러한 대우에 대하여 어떻게 다 기워 갚아야 할지를 모르는 일이 되어 버립니다.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면서 순간순간 작은아들과 같은 모습과 행동으로 주님과 만나왔다는 사실이 느껴질 때는 오늘 비유에서와 같은 아버지의 마음이, 나를 지금 이렇게 이 자리에 올 수 있도록 해 주신 원동력이란 생각으로 너무도 감사하고 다시 한 번 정신을 차려서 세상 속에서 주님의 증거자로 살아가는 힘을 얻기도 합니다.
큰형의 모습에서 어느 부분이 잘못되었다고 감히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항상 아버지 옆에서 자신의 일을 충실히 해 왔던 그 아들은 아버지의 파격적인 모습에 질투를 느끼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리고 앞에서 언급했듯이 다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으려면 따끔한 꾸중과 대가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그 속에는 자기중심적인 사고가 숨어 있습니다.
아마도 아버지가 아들을 꾸중하고 내 쫓았다면 그 큰아들은 승자의 모습으로 패자의 동생에게 위로의 말을 던졌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큰아들에게 변화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아버지의 신임과 그 모든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아버지가 자신이 생각 할 때 인간 같지도 않은 둘째에게 베푸는 사랑이라는 것이 말도 안 되는 것입니다.
그는 아버지가 항상 둘째를 걱정할 때 아버지를 안심시키기 위해서라도 잘 지내고 있을 것이라고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말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딴 마음을 먹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몹쓸 놈을 찾아보아서 무엇하겠는가?”
만약 형이 여기에 조금만 더 관심이 있었다면 동생에 대한 소식을 먼저 알 수 있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알고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서 무심하게 방관했던 것입니다. 형의 그러한 방관의 마음도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돌아온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에 비하면 너무도 이기주의적인 마음인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잘못에 대해서는 작은아들과 같은 용서를 바라고 있으면서 우리가 판단하는 이웃에 대하여는 큰아들과 같은 냉정함으로 대하는 경우들이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웃을 비판하고 판단할 때 보면 분명한 이유가 있으며 타당성도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우리가 이웃을 통하여 그런 이야기를 듣게 되면 신앙인으로써의 모습을 들먹거리면서 다시 비판의 말을 던지기도 합니다.
하염없는 기다림과 사랑으로 자식들을 받아주는 오늘 아버지의 모습을 생각하면서 우리 모두도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 속에서 아버지의 사랑을 전하는 그런 사람들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합시다.
천주교 부산교구 고원일 신부 - 2001년 3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