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번까지 글에서 보았듯이 사람들은 고통 속에서, 불안 속에서 답을 찾아 나선다.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답을 여기저기서 찾아본다.
그리고 그것들이 영원한 답인 것처럼 꼭 붙들고 산다.
점을 치고, 무당을 찾고, 신흥영성에도 기웃거려보고, 수행법도 배워본다.
요즈음에는 "좋은 것이 좋은 것", "그 답이 그 답"이라는 말도 두루 통한다.
과연 그럴까?
2004년 하반기 세간의 주목을 받았던 서울평협 주최 명동성당 "하상대학"강좌에서
정의채 신부(몬시뇰)가
"상대주의는 지나갈 것이며 인간은 궁극적으로 절대자 안에서만 답을 발견하게 되어 있다"
는 요지의 발언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필자는 원로 철학자로서 그리고 형이상학계 거두로서 했던 이 발언을
권위 있는 예언으로 받아들이고 싶다.
정의채 신부의 이 발언은 특히 요즘 젊은 세대에서 확산되고 있는
포스트모더니즘에 적용되는 말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이 내세우는 이성(理性) 대신에
감성(感性)을 믿을 만한 판단 및 행동 준거로 내세운다.
곧 오감이 명하는 대로 살면 그것이 옳게 사는 길이라는 것이다.
이성은 보편타당한 진리를 추구하지만,
감성은 "그때그때"의 주장에 가치를 부여한다
(웃자고 하는 말로 "그때그때 달라요!"라는 식.).
그래서 모던 사회가 상식, 합리성, 공동선 중심의 가치관을 표방했음에 반하여,
포스트모던 사회는 느낌, 부딪힘, 개성 중심의 가치관을 추구한다.
요컨대, 포스트모더니즘이 내세우는
"감성"의 전선성(全善性:감성에 충실한 것은 모두 선하다는 생각)으로 인해
절대적 가치기준이 허물어지고 상대주의가 득세하고 있다.
사람들은 점점 보편적이고 근원적 진리 개념을 거부하고,
모든 사상은 단지 계급이나 성별, 인종에 따라 만들어진 사회적 구축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절대 진리는 없고 그때그때 집단의 관점만이 존재할 따름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든 관점, 모든 생활양식, 모든 신념과 행동이
모두 동등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본다.
이는 인류를 혼돈으로 몰아넣을 공산이 짙다.
상대주의는 선과 악, 참과 거짓의 경계선을 없애버린다.
때문에 프리섹스, 약물, 헤비메탈 음악 등이 "명상"의 이름으로 난무하고
허무와 광기의 문화가 버젓이 "신영성"의 이름으로 종교시장에 출시되어도
사람들은 그것이 "구원"의 손길인 줄 안다.
"대화"와 "개방"의 이름으로 좋은 것이라면 가리지 않고 수용하는 것이 미덕인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다.
이런 세상에서 "예스"와 "노"를 분명히 한다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상호인정이 역설(力說)되고 있는 와중에 시시비비(是是非非)를 따지는 것 자체가
전근대적이라고 치부되어 반감을 사기 십상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진리"가 "거짓"과 동일시되는 것을 수수방관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예수와 무당을 동일한 종교인으로 대접하는 현상을
그냥 시대 흐름이라고만 얘기할 수는 없는 일이다.
서점에 가보라.
얼마나 많은 오늘의 "메시아"들이 그럴듯한 가르침으로
"심지 얕은" 가톨릭 신자들을 향해 손짓하고 있는지 보라.
그리고 신자들에게 물어보라.
그들이 최근에 감명 깊게 읽은 책들이 어떠어떠한 책들인지.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는 사도 바울로의 다음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새겨들을 줄 알아야 할 것이다.
"훗날에 사람들이 거짓된 영들의 말을 듣고 악마의 교설에 미혹되어
믿음을 버릴 때가 올 것이라고 성령께서 분명히 말씀하십니다4,"(1 디모 1).
철학사를 더듬어보면 일찍이 그리스 고대철학 태동기에도 이런 진통이 있었다.
상대주의 시대가 있었다.
온갖 궤변론자들이 군웅할거하며 허무맹랑한 주장을 펼치던 시대가 있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철인(哲人) 소크라테스는 이런 혼란 속에서도
보편타당한 진리가 있다고 믿고 그것을 구명하고자 했다.
그의 제자 플라톤 그리고 그 제자 아리스토텔레스에 이르러
절대적 진선미(眞善美)에 대한 철학적 사유가 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그 이후 철학사는 보편타당한 진리의 점근선(漸近線)에 가까워졌다가
다시 멀어졌다가 하는, 그러면서 그 점근선에로 접근하는 반복 과정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정의채 신부의 저 예단(豫斷)은 이런 철학사 흐름을 꿰뚫은 통찰인 것이다.
일찍이 청년시절 일본에서 종교학을 전공하고서 평생을 다하여 구도의 길을 걸었던
시인 구상 세례자 요한(1920~2004)은 "진정한 답은 하나"라고 고백했다.
그의 "나는 알고 또한 믿고 있다"는 제목의 시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확신을 읽게 된다.
이 밑도 끝도 없는
욕망과 갈증의 수렁에서
빠져나올 수 없음을
나는 알고 있다.
이 밑도 끝도 없는
고뇌와 고통의 멍에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나는 알고 있다.
이 밑도 끝도 없는
불안과 허망의 잔을
피할 수 없음을
나는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또한 믿고 있다.
이 욕망과 고통과 허망 속에
인간 구원의 신령한 손길이
감추어져 있음을,
그리고 내가 그 어느 날
그 꿈의 동산 속에 들어
영원한 안식을 누릴 것을
나는 또한 믿고 있다.
이 짧은 시에는 가톨릭 신앙의 핵심이 실려 있다.
시인은 먼저 자신이 무엇을 알고 있는지 고백한다.
시인이 알고 있는 것은 어찌할 수 없는 인간의 한계(限界)이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벗어날 수 없는 굴레를 시인은 인간이 처한 현실로서 인정한다.
자신 안에 도사리고 있는 욕망, 갈증, 고뇌, 고통, 불안, 허망 등을
인간 스스로는 벗어날 수 없다는 한계가 바로 인간 현실이라는 사실을 시인은 수긍한다.
사실, 시인은 종교학을 전공하던 시절부터 한평생 진지한 구도자로서
인간의 자력구원 가능성을 탐색해 왔다. 만년에 가서 그는 결론에 도달했다.
스스로는 저 굴레에서 "빠져나올 수"도 "벗어날 수"도 "피할 수"도 없음을
뼈저리게 절감하였다.
그리스도교는 이 피할 수 없는 한계가 바로 원죄(原罪)의 소산이라고 가르친다.
이 점을 시인은 분명히 "알고" 있었다.
시인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시인은 자력구원 한계에 대한 "앎"을 넘어서 이제 자신의 "믿음"을 고백한다.
시인은 굳게 믿었다. 바로 저 피할 수 없는 한계를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인간 구원의 신령한 손길"이 있다는 것을 시인은 믿었다.
시인은 인간을 구원으로 이끌어주는 것은
절대자 하느님에게서 오는 "신령한 손길"밖에 없음을 통감하고
이를 "믿을" 수 있었던 것이다.
시인이 고백했던 믿음을 우리도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기에 스스로 "구원"에 이를 수 없음을 깨달을 수 있어야 한다.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하느님 자비와 용서, 은총이라는 사실을
수긍할 수 있어야 한다.
하느님을 믿을 일이다.
요즘 시중에 상품화되어 나도는 온갖 영적 불량품에 현혹되지 말고
오직 하느님을 찾을 일이다.
사람이 되시어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한 14,6)이심을 입증하셨던 그분만을 따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