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 6개월, 길면 2년
"여러분은 세상이나 세상에 속한 것들을 사랑하지 마십시오.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그 마음속에 아버지를 향한 사랑이 없습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 곧 육체의 쾌락과 눈의 쾌락을 좇는 것이나 재산을 가지고 자랑하는 것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고 세상에서 나온 것입니다. 세상도 가고 세상의 정욕도 다 지나가지만 하느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입니다."(요한 1서 2장 12-17절)
가톨릭교회 안에서 출판되는 잡지 가운데 베네딕도회에서 발행되는 "들숨날숨"이란 잡지가 있습니다. 모든 잡지들이 나름대로의 특색을 지니고 있지만, "들숨 날숨"은 진지하고 알찬 내용으로 우리들의 흔들리는 영성생활을 바로 잡아주는 방향타 역할에 충실하기에 적극 추천하고 싶은 잡지이기도 합니다.
이 잡지의 주간인 조광호 신부님께서 이번 호 첫 페이지에 이런 글을 쓰셨습니다.
얼마 전 미국 전시회에서 만난 화가 박안젤라 씨는 유방암 4기 환자로, 참으로 믿기 어려운 삶을 살아가고 있다. 골수에까지 퍼진 암을 몸속에 지니고 살아가는 환자답지 않게 그녀는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두 아들과 남편을 보살피는 주부로서 살아가고 있다.
참으로 놀라운 사실은, 살아있는 세포까지 공격하는 항암주사를 매주 맞으면서도 끊임없이 자신의 내면세계를 그림으로 그리며 왕성하게 활동할 뿐 아니라, 오히려 주변 사람들을 위로하고 그들의 어려운 일들을 자기 일처럼 도와가며 살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나는 우연한 기회에 그녀의 보호자로 암 병동에 따라가서 그녀가 말기 암 환자들에게 정기적으로 투약하는 주사를 맞는 것을 곁에서 지켜보고 나서야, 그녀가 육체적, 정신적으로 얼마나 큰 고통을 신앙으로 극복해내고 있는지를 알게 되었다.
그녀는 초췌한 모습의 말기 암 환자들이 즐비한 병원에서 한 시간 가까이 투약을 받으면서도, 지나가는 간호사에게 안부를 묻고 농담을 건네며 마치 영양주사를 맞는 사람 같았다.
"그렇게 고통스런 가운데서 어떻게 감사의 기도를 드릴 수 있느냐"고 물으니, 그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신부님, 이러한 고통과 시련이 없었다면 세상에서 무엇이 가장 소중하며, 무엇이 가장 아름다운 것인지 그리고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제가 어떻게 알 수 있었겠습니까?"하고 말했다.
얼마 전 주치의로부터 앞으로 6개월, 길면 2년을 더 살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에도, 그녀는 마음속으로 "아닙니다. 나에게 시간이란 것은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참으로 소중한 것은 <하느님이 나에게 주신 오늘>이 있을 뿐이기에 그 시간의 분량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녀가 믿는 하느님은 그녀에게 병을 주고 약을 주는 하느님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그녀와 함께 숨쉬고 살아가는 임마누엘 하느님"이라는 것을 나는 알았다.
오늘 제1독서에서 요한은 이렇게 선포합니다. "세상도 가고 세상의 정욕도 다 지나가지만 하느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입니다."
돌아보니 수도자로 산다고 살아오면서도 지독하게도 세상에 집착했던 삶이었습니다. 철저하게도 세상에 안주했던 삶, 세상 사람들보다 더 세상적 사고방식으로 살아왔던 삶을 반성합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도 이 세상을 극복하고 초월한 자매님의 삶이 참으로 돋보입니다. 결국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은 이 세상을 소중히 여기지만 이 세상에 연연하지 않는 삶입니다.
이 세상을 사랑하지만 이 세상에 집착하지 않는 삶입니다.
가톨릭 GoodNews “오늘의 묵상”에서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2002년 12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