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된 믿음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집에 모실만한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하시면 제 하인이 낫겠습니다.
오늘 복음(마태오 8,5-11)에서의 이 백인대장의 말은
우리가 늘 미사 때 영성체를 앞두고 되뇌는 말이다.
마치 습관처럼 되어서 내겐 이제 별로 감흥을 가져다주지 못하는 말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오늘 복음의 상황으로 돌아가서 백인대장을 생각해 보면
참으로 뛰어난 믿음, 본받고 싶은 믿음, 미사 때 그 말을 입에 올릴 때마다
주님께 그런 믿음을 주십사고 청하고 싶은 믿음을 그는 가지고 있었다.
자신의 식민지 국가에서 주둔군으로 와 있는 그는,
그것도 어느 정도 계급을 가지고 있는 그는 비록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해도
로마군대를 아주 천하고 더럽게 생각하고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똑같이 보복하는 마음으로 그들을 경시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는 그들을 존중하면서 그들의 하느님을 공경했다.
그는 진심으로 하느님을 찾는 사람, 하느님께 열린 사람이었기에
그들에게 그렇게 할 수 있었고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을 알아 뵐 수 있었다.
이런 그의 믿음은 참된 믿음의 성격을 보여주고 있다.
믿음이란 단순히 믿는다는 것을 넘어 있다.
믿음이란 하느님에 대한 참된 인식이요 자신에 대한 참된 인식이다.
진실한 믿음을 통해 사람은 하느님을 알아 뵐 수 있으며
그럴 때 자신의 무가치함, 부족함을 절실히 깨닫게 된다.
하지만 그런 깨달음은 우리가 보통 자기비하(自己卑下)라고 부르는
부정적인 의미의 낮추어짐과는 달리
하느님의 선하심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에
절망이나 움츠러듬 대신에 백인대장과 같이 주님께 더 가까이 가게 된다.
습관화된 구절의 되풀이에서 벗어나
그 말이 진실로 내 말이 될 수 있는 은총을 청한다.
성 바오로 수도회 홈페이지 “말씀 묵상”에서 - 2002년 12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