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례자 요한의 출생
그리스도인들은 두 가지 전혀 차원이 다른 현실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하느님 나라와 복음이라는 현실과 구체적인 삶의 현장이라는 현실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하느님 나라와 복음을 현실로 받아들이고 있지 않는 것 같습니다. 하나의 ‘이상’ 쯤으로 여기는 것이지요.
그러기에 이상으로 여겨지는 하느님 나라와 복음은 현실의 위력 앞에서 뒤로 밀려나기 십상입니다. 이러다 보면 신앙은 하나의 고상한 악세서리로 변하고 맙니다. 신상명세서의 종교란을 채우기 위해 종교 한가지쯤은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종교가 하나의 기호품 정도로 전락하고 맙니다. 여기에서 신자들의 숫자는 늘어나지만 세상은 오히려 비복음적으로 전개되는 기막힌 상황이 벌어집니다.
무엇이 진정 그리스도인의 현실인지?, 현실이어야 하는지? 묻게 됩니다. 구체적인 삶의 현장을 전혀 무시할 수 없습니다. 무시해서도 안됩니다. 다만 이것만을 현실로 받아들이고 하느님 나라와 복음을 고상한 이상으로 넘겨버리는 그릇된 현실 인식만은 철저히 경계해야 합니다.
세례자 요한의 아버지 즈가리야와 어머니 엘리사벳이 감지하고 있는 현실과 다른 이웃과 친척들이 감지하고 있는 현실은 달랐습니다. 아기 이름을 요한이라고 짓느냐 즈가리야라고 짓느냐라는 문제는 과연 무엇을 절박한 현실로 받아들이고 있느냐? 라는 문제와 다름없습니다. 여기에서 하느님의 구원 역사를 현실로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과거의 인간적인 전통을 현실로 받아들일 것인가라는 중대한 결단이 요구됩니다. 이 선택의 기로에서 즈가리야와 엘리사벳은 모든 이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구원 역사를 자신의 현실로 기꺼이 받아들입니다. 아기 이름을 요한이라고 지음으로써 말입니다. 이들이 선택한 현실은 이제 다른 이들에게도 걷잡을 수 없는 힘으로 번져갈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참된 현실은 하느님 나라와 복음이어야 합니다. 이 현실을 또 다른 현실, 구체적인 삶의 현장 안에서 실현하고,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야 합니다.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 - 2000년 12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