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 되게 하소서
(요한 17,20-26)
그저께 수도원 월 피정을 가지면서 형제들의 성격 유형 검사(MBTI)를 하였다.
16가지 유형으로 성격을 구분하는데 같은 형제가 거의 없을 정도로 천차만별이었다.
함께 살면서도 서로가 이렇게 다른 기질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이 놀랍기만 하였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같은 지향과 목표를 가지고 프란치스칸 수도자로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가 되어 살아갈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이 <신비>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우리는 주님의 유언적 바램이기도 한
이 <하나 되게 하소서>라는 표현과 기도를 아주 좋아한다.
또 정말 그렇게 되기를 희망한다. 그런데 이 하나 되지 못함에 대한 생각 때문에
우리는 늘 상처입고 아파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된다.
<하나 되게 하소서>는 늘 염원일 뿐이란 말인가!
현실은 하나가 아니라 다수이고 일치가 아니라 마치 분열처럼 보이니 말이다.
가정에서든, 직장에서든, 교회 공동체 안에서든 늘 이러한 문제 때문에
고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럼 이 <하나 되게 하소서>란 주님의 간절한 기원은 모두 허사란 말인가?
아니, 주님께서 바라셨던 그 <하나>란 도대체 어떤 상태를 의미한단 말인가?
오늘은 이 문제를 한번 짚어보자.
우선 하나 됨(일치)은 주님의 마지막 유언이라는 사실은 마음속에 꼭 간직하자.
일치에의 노력을 불가능한 것이라 여기며 모르겠다고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분의 유언이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이 일치를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노력을 게을리 하는 한 우리는 예수님의 참 제자라 할 수 없다.
다음으로 예수님께서 생각하시는 이 하나 됨(일치)에는 모델이 있다.
그 모델은 바로 <아버지와 내가 하나이듯...>이다.
다시 말해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이 다른 위격을 가지고 계시면서도 하나이듯이
그렇게 하나 됨을 말씀하신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 모두의 다름을 전제로 하고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느님께서 각기 다른 위격이듯이,
우리 가족과 공동체의 구성원들도 각기 다른 기질과 성격의 소유자들임을
부정해서는 안 된다.
그 다름이 이 하나 됨에 반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보통 이 점에 있어서 잘못 생각하는 듯하다.
그렇다면 하느님은 어떤 점에서 하나이신가?
동방교회의 이콘 중에 삼위일체 하느님 이콘이 있는데,
그림이 드러내 주는 삼위일체의 표상은
바로 부드러움과 서로를 향해 기울어 있다는 점이다.
성부, 성자, 성령은 각기 다른 삼위이시지만
이렇게 사랑 안에서 서로에게로 향하고 있다는 점이 중요한 포인트로 제시되고 있다.
따라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우리가 하나이듯이 이들도 하나가 되게 해 달라>는 표현은
이들도 서로 다르지만 하느님 나라라는 궁극적인 목표를 위해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하고 향하게 해 달라는 말씀이 아니겠는가?
오늘 사도행전의 독서는 이 일치에 대한 중요한 한 부분을 제시해 준다.
사도 바오로는 유다인들의 시기 질투로 엄청난 위기를 겪게 되는데,
그들의 분열된 사고 때문에 그 위기를 빠져 나오게 된다.
사두가이파와 바리사이파는 바오로로 대표되는 예수의 제자들에게
엄청난 기득권 손실의 측면에서 강압적이 되어 하나가 되는 듯 보였지만,
실제로 자신들의 중심 논리인 부활 문제에 있어서는 자기주장에만 급급함으로써
분열을 일으키게 되고 그 덕분에 바오로는 구사일생으로 살아나게 된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이데올로기에 있어서의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다.
사고가 똑같아야 되고,
내가 주장하는 것을 다른 사람도 그대로 수용해야하는 파당적인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서로 다름을 깊이 인정한다는 점에서 참으로 민주적으로 하나가 되는 길을 원한다.
또 그러기 위해서는 그 구성원들이
<나>에게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너>에게 기울어짐으로써
<나>에 대한 관심보다는 <너>에 대한 관심을 통해서
사랑 안에 하나가 되는 그 길을 살고자 함이다.
이것이 주님께서 바라시는 그 하나 됨이 아니겠는가?
<나는 살레시안이 좋다, 나는 프란치스칸이 좋다>,
<나는 교구신부님보다 수도회 신부님이 더 좋다> 등의 논리도 파당적 논리이다.
그 다름이 아름답게 느껴지고 서로가 서로에게로 기울어져 있음이 진정한 하나 됨이다.
정원을 장미꽃이나 백합으로만 장식하는 그런 아름다움이 아니라
이 꽃 저 꽃 모두가 어우러져 있는 그런 하나 됨의 아름다움이
주님께서 원하시는 하나 됨의 아름다움이다.
성직자는 수도자와 평신도들에게 기울어져
어떻게 하면 더 나누어 줄 수 있을까를 생각하고,
수도자는 성직자들과 평신도들에게로 향해 무엇을 더 나누어줄 수 있을까 생각하고,
평신도들은 성직자와 수도자들에게 무엇을 드릴 수 있을까 서로 생각해 줌으로써
우리는 주님께서 바라시는 바로 그 일치에로 나아갈 수 있을 게다.
가정 안에서도 아빠는 아내와 아이들에게 무엇을 더 해 줄 수 있을까를,
엄마는 남편과 아이들에게,
아이들은 엄마와 아빠에게 무엇을 더 해 줄 수 있을까 더 생각해 줌으로써
이 아름다운 하나 됨으로 나아갈 수 있다.
<내>가 먼저가 아니라 <너>가 먼저인 상태가
삼위이신 하느님이 일치를 이루시는 방법이라면
우리 또한 그 길이 아니고서야 어찌 진정한 하나 됨을 이룰 수 있으리오...
오, 주님,
<나>에게 집착함으로써 하나 됨이 어렵다 하지 말고
<너>에게 집착함으로써 그 하나 됨을 이루어가게 우리를 도우소서. 아멘.
오상선 바오로 신부 - 2002년 5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