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한다는 것
“나의 사랑하는 제자들아, 내가 너희와 같이 있는 것도 이제 잠시뿐이다.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주겠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사도 바오로는 <믿음, 희망, 사랑, 이 세 가지 중에 가장 위대한 것은 사랑입니다.>고 고린토 전서에서 사랑을 노래한다. 우리는 하느님 자신이 바로 사랑이신 분이라고 여긴다.
사도 요한은 <하느님은 사랑이시다!>고 노래한다.
이 사랑은 오늘 복음에서 보듯이 예수님의 고별사의 주제이고 유언이기도 하다. 사랑을 통하지 않고서는 사랑이신 하느님을 맞대면 할 수가 없기에 <사랑하라!>는 메시지는 아무리 강조하여도 지나침이 없다. 그런데 누가 그것을 모르랴?
우리 인간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단어 중의 하나가 바로 이 <사랑>이란 단어라고들 하지 않는가? 그처럼 이 사랑이 아름답고 좋은 것인 줄, 또 사랑하며 살아야 하는 줄을 우리 모두는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랑이 쉽지 않음은 무엇 때문일까?
나는 결혼식을 주례할 때마다 신랑 신부에게 고린토전서 13장의 사랑의 찬가를 코팅해서 신랑신부가 함께 제2독서를 하게하고 그것을 선물로 주곤 한다. 그러면서 지금까지 사랑해 오고 추구해온 사랑의 개념은 이제 결혼을 통해 한 단계 성숙 발전해 나가야 한다고 역설하기도 한다. 즉, 연애시절 늘 달콤한 사랑을 추구해 왔다면 또 그러한 것이 사랑이라고만 생각해 왔다면 이제 결혼하고 나서의 사랑은 다른 사랑이라고 말해준다. 여전히 그런 사랑을 추구하게 되면 결혼생활은 만족할 수 없을 것이고 사도 바오로가 노래하는 서로 참아주고 인내하고 덮어주는... 그러한 사랑을 추구해야만 성공할 수 있으리라고...
주님께서는 오늘 또다시 우리에게 어떻게 보면 이제 진부하게 느껴지고 식상하게 느껴지는 <사랑의 계명>을 강조하신다. 귀가 따갑게 들으면 무엇 하나? 그 말씀이 나의 것이 되지 않는다면...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그저 좋은 말씀이 아니다. 이는 당신이 죽음을 앞두고 제자들에게 신신당부하시는 유언의 말씀이시다. 대충 듣고 <알았습니다. 그만 하이소>라고 넘겨서는 안될 말이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다른 누구에게 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바로 지금, 나에게 하시는 말씀이시다.
분명 내가 사랑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잘못 사랑하고 있는 점이 있다는 말씀이시다. 더 구체적으로 사랑해야하는데 내 식대로만 사랑하고 있다는 말씀이시다.
그럼 어떻게 사랑하란 말인가?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하라신다.
그분은 우리를 어떻게 사랑했는가?
우리를 위해 이 세상에 가난한 분으로 오셨고 이 세상에서 가난하게 사셨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자신을 희생 제물로 내어 놓으셨고 우리의 배신과 배반을 끝없이 용서하셨고 늘 우리와 함께 계시기 위해 성령을 보내주시고 그것도 모자라서 성체의 형상으로 우리 몸 안에까지 오셔서 함께 하시고자 하신다. 그분의 사랑은 이렇게도 구체적이고 함께 하시고 싶어서 안달을 하시고 모든 수단 방법을 찾아 강구하시는 그런 사랑이시다.
이에 비하면 나의 사랑은 너무도 형식적이 아닌가?
그냥 보여주기 위한 사랑은 아닌가?
내가 사랑 받기 위해, 그 대가를 위해 하는 사랑은 아닌가?
그래서 그 대가가 되돌아오지 않을 때는 쉽게 미워하고 증오하고 꼴도 보기 싫어하는 그런 이기적인 사랑이 아닌가?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다시 사랑의 새 계명을 내려주신다. 2000년 전에 제자들에게 내려주신 유언만이 아니라 지금 나에게 애타게 호소하시며 내려주시는 유언이요 고별사이다. 이 사랑을 다른 사람들이 보고 느낄 수 있는 그런 구체적인 사랑, 다른 사람과는 구별되는 예수의 제자만이 보여줄 수 있는 그런 사랑을 살아 라고 하신다.
나는 정말로 주님을 사랑하는가?
나는 정말로 나를 사랑하고 나의 가족과 형제자매들을 사랑하고 있는가?
어떻게?
다른 사람이 그것을 보고 내가 예수의 제자임을 알 수 있도록 그렇게 사랑하고 있는가?
오늘 하루 이 사랑한다는 것에 우리의 초점을 맞추자!
오상선 바오로 신부 - 2001년 5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