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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야기나눔] 구제역-강우일주교님 가톨릭
  ۾ : 테아     ¥ : 11-01-31 12:38     ȸ : 2907     Ʈ ּ

구제역 사태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성찰


최근 우리나라에서는 구제역의 확산으로 소, 돼지 등만 2백만 마리 넘게
살처분 당하고 생매장당하는 가슴 아픈 일이 벌어지고 있다.
조류독감으로 인해 집단 매장되는 닭이나 오리는 얼마나 많은지 정확한 집계도 잘 안 되고 있다.
그 전에도 구제역이 발생한 일은 여러 번 있었지만,
이번처럼 전국으로 확산되고 그 피해가 큰 적은 처음이다.
소의 경우에만 2000년 이후 구제역과 브루셀라 병으로 해마다 수 천 마리씩 살처분되었고
2006년에는 브루셀라 병으로 25,454 마리가 살처분된 것이 가장 많은 사례였으나
이번의 구제역으로 인한 소의 살처분은 10만 마리가 넘고 돼지는 수도 없이 살처분되었다.
이는 우리나라 축산의 역사상 처음 있는 대재앙이다.

농민들은 몇 년씩 정성들여 키운 가축을, 어미 소와 함께 송아지까지
한꺼번에 파묻어야 하는 고통을 겪으며 정신적으로 거의 공황상태에 빠져들었다.
수의사들은 수의사들대로 자신들이 동물의 의사가 된 목적은 원래 동물의 생명을 지키고
보살펴주는 것인데 왜 오늘과 같은 살처분의 기수로 앞장을 서야 하는지
자신의 직업에 대한 위기감을 느끼며 힘들어하고 심신이 소진된 상태라고 한다.
또 수많은 가축을 한꺼번에 땅속에 산채로 묻어야 하는 공무원들도
살처분당하는 소나 돼지들의 외마디 비명 소리가 귀에서 떠나지 않고
환청에 시달리거나 불면과 식욕부진으로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다고 한다.
이들 모두가 마음의 고통을 이기지 못해 밤잠을 못 이루고 불안과 충격 속에 해매고 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할까? 그것은 아무리 짐승이라고 해도
이런 대량 도살이 인간으로서는 해서는 안 되는 일이요,
도리에 한참 어긋나는 일임을 이 사태를 체험한 모든 사람이 온 몸과 마음으로 느낀다는 것이다.
사람이 다른 인간을 향하여 어떤 폭력을 행사하면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만,
짐승에 대해서는 옛날부터 사람이 사냥을 하거나 식용으로
도축을 해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일이 없었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고 옛날부터 가축을 양식의 일부분으로
삼아왔기 때문에 크게 문제 삼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 사태를 겪으면서 관계자들 모두 대단한 양심의 가책을 겪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렇게 온 몸으로 그 부작용을 느낄 수가 없는 것이다.

나도 전부터 구제역이나 조류독감이 유행하면서 많은 가축들이
집단으로 살처분되는 것을 보며 마음이 불편했으나 크게 마음 쓰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 사태를 지켜보며 단순히 잠시 마음이 불편한 것으로 넘어갈 일이 아님을 성찰하게 되었다.
이번 사태에 직접 관련된 이들이 겪는 정신적인 트라우마를 보면서
이것은 무엇인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전통적으로 유다교와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육식을 금하지 않았다.
구약성서에도 가축을 잡아서 제사를 지내거나 식용으로 삼는 일은
일상적인 관행으로 허용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동서양을 막론하고 근세에까지 가축은 각 가정에서 키워서
그 집안에서 아니면 기껏해야 인근 마을에서 먹을 수 있는 분량 정도만 사육하였다.
그런데 현대에 들어와서 산업 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대규모 축산 농장을 차리고 냉동시설을 갖추면서 가축이
더 이상 가축이 아니라 공장 생산물이 되어버렸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본디 드물게 제사 때나 명절 때나 고기 맛을 보았는데, 지금은 수시로 고기로 포식을 한다.

우리나라에서 소비되는 소, 돼지, 닭의 생산액 통계를 보면
2009년에는 2002년의 두 배가 생산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육류가 외국으로 수출되는 액수는 아주 미미하고,
외국에서 수입되는 육류가 상당한 분량임을 감안하면,
옛날 명절 때나 고기 맛을 보던 시절에 비교하여
오늘날 우리는 엄청난 양의 육류를 소비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우리들의 이러한 왕성한 육류 식욕에 부응하기 위하여
축산업계는 최단 기간에 가장 많은 육류를 생산하려고 온갖 인공적인 수단을 다 동원한다.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와 비교할 때 가축들이 움직일 틈도
거의 없는 가장 협소한 축사를 운영하고 있다.
소는 원래 되새김질 하는 동물임에도 풀을 주지 않고
목구멍을 넘어가면 바로 소화되고 영양분으로 변화되는 옥수수,
그것도 대부분 유전자 조작이 된 옥수수를 사료로 공급하고 있다.
그리고 질병을 예방하기 위해 끊임없이 투약되는 항생제 등으로
가축들의 건강이 더 이상 병균에 저항할 정상적인
면역력을 잃어버려 힘없이 무너져 버린다고 한다.
한마디로 우리 모두의 지나친 육류 식욕과 가축을 생산품으로 만들어
이윤을 극대화하려는 축산업계의 상업적 욕심이 이런 비극을 초래한 것이다.

이러한 육류의 과도한 소비는 이미 지구 생태계의 균형에 적지 않은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지구상에서는 아직 수천만 명의 인간이 곡식의 부족으로 기아에 시달리고 있는 실정인데
지구에서 생산되는 전체 곡식의 3분의 1이 가축들 사료로 소비되고 있다.
그런가 하면 북반구의 선진국 사람들은 육류 과잉 섭취로
심장발작, 암, 당뇨병 등으로 목숨을 잃는 사람의 수가 기아에 시달리는 사람의 수보다 더 많다.

사람이 하루에 마시는 물은 평균 5리터 남짓이다.
생활용수까지 따지면 하루 150리터 정도를 사용한다.
1킬로그램의 쌀을 수확하기 위해서는 2,000리터에서 5,000리터 정도의 물이 쓰인다.
그런데 소를 키워 쇠고기 1킬로그램을 얻기 위해 들어가는 물의 양은 24,000리터다.
육식을 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채식을 하는 것보다 최소한 5배의 물을 사용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참조: ‘강의 죽음’ 프레드 피어스 지음)
지구상의 강들이 갈수록 말라가고 사막화가 진행되어 물부족을 걱정해야 하는 오늘날
과도한 육식을 하기 위하여 엄청난 양의 물을 소비하는 우리들의 식생활 구조 자체가
이제는 진지하게 재고되어야 하지 않을까?
중남미 대륙에는 수백만 에이커에 달하는 열대 우림 지역이
이미 소 방목용 목초지로 개간 중이며 사하라 이남과 미국,
호주 남부 목장지대에서 진행 중인 사막화의 주된 요인은 소 방목이라고 한다.
육식은 지구 환경에 치명적인 훼손을 가져오고 있다.
그리고 사육장에서 흘러나오는 축산폐기물도 지구 환경을 훼손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고 있다.
‘소 1만 마리를 사육하고 있는 비육장에서 배출되는 유기폐기물은
11만 인구의 도시에서 발생하는 쓰레기 양과 맞먹는다’는 것이다.
(참조: ‘육식의 종말’ 제레미 리프킨 지음)
우리가 육류 소비를 확대하는 것은 이런 다양한 부작용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며

하느님이 태초에 설계하신 창조 질서에 심각한 무질서와 불균형을 초래하는 것이다. 
나는 이번 구제역 사태가 발생한 다음에 창세기를 다시 읽어보았다.
하느님께서는 태초에 만물을 창조하시며 땅 위에 온갖 생물들을 제 종류대로 창조하셨다.
집짐승과 들짐승,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을 기어 다니는 온갖 것을 만드셨다.
하느님께서 만드신 이 모든 생물들을 보시니 좋았다고 한다.
보시니 좋았다는 것은 생물의 각 종류가 모두 그 나름의 존재 가치와
존재 의미와 고유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음을 선언하신 것이다.
하느님께서 이어서 인간을 창조하시고 그들에게 복을 내리며 말씀하셨다.
‘자식을 많이 낳고 번성하여 땅을 가득 채우고 지배하여라.
그리고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을 기어 다니는 온갖 생물을 다스려라.’(창세기 1,28)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온갖 생물을 다스리는 역할을 주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다스리라고 하신 말씀을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
다스리라는 것은 피조물을 인간의 멋대로 아무렇게나 마구 다루거나 착취해도 좋다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께서 다스리라고 하신 것은 온갖 생물이 하느님께서 부여하신
그 고유의 존재 가치와 아름다움을 잘 유지하고 보존할 수 있도록 지켜주고 보살피라는 말씀이다.
구약성서에서 백성을 억압하고 착취하고 멸망으로 이끄는
위정자들은 모두 다스릴 자격을 박탈당하고 쫓겨났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다스림은 백성을 보호하고
백성이 인간다운 삶을 자유롭고 평화롭게 이어갈 수 있도록 지켜주는 일이다.
그러나 현실 역사 속에서 이스라엘에는 좀처럼 하느님이 원하시는 다스림을
실현하는 위정자들이 나타나지 않았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때가 차자 당신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는 당신 외아들을 메시아로 보내셨다.
그분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고
성실하게 공정을 펴는’(이사야 42, 3) 새로운 유형의 다스림을 실현하러 오신 하느님의 종이었다.
하느님께서 인간이 다른 피조물들을 다스리라고 하셨을 때에는
인간 이외의 피조물들도 그런 다스림으로 아끼고 보존할 것을 원하신 것이다.
땅위에 인간이 타락하여 폭력으로 가득 차 있을 때 홍수가 일어났다.
하느님께서는 노아의 식구들과 함께 방주에 온갖 생물들을
한 쌍씩 집어넣으시고, 노아와 ‘함께 살아남게’ 하셨다.(창세기 6,17-20) 
하느님께서는 홍수로 물이 온 땅을 뒤덮었을 때에도
‘노아와 함께 방주에 있는 모든 들짐승과 집짐승을 기억하셨다.’(창세기 8,1)고 한다.
‘기억하셨다’는 것은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이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오래오래 이어진다는 의미다.

홍수가 끝난 다음 하느님께서는 노아와 그 가족과 함께 모든 생물들이
‘땅에 우글거리며 번식하고 번성하게 하여라.’(창세기 8,17) 하고 축복하셨다.
하느님께서는 홍수가 끝난 다음 노아와 그 자손들과 계약을 맺으시고, 
그들과 함께 있는 새와 집짐승과 땅의 모든 들짐승과도 계약을 맺으셨다.(창세기 9,9-11)
계약을 맺으셨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그들의 멸망을 원하지 않고
그 생명을 지켜주실 것임을 약속하신 구원과 은총의 선언이다.
결국 창세기의 가르침에 의하면 짐승들도 모두 하느님의 구원의 대상이고 보살핌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교회가 오늘의 세상에 기쁜 소식을 선포하려면,
교회는 세상이 오늘 어떤 멍에를 짊어지고 있는지, 어떤 덫에 걸려 신음하는지,
또 어떤 아픔과 어떤 슬픔에 시달리는지 예민하게 공감하고 동반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 모두 예배 위주의 관행적 신앙생활의 매너리즘에서 벗어나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우리 자신과 무관한 일로 흘려보내지 말고
복음적 시각으로 바라보며 성찰하여 회심의 열매를 맺어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예수님처럼 시대의 가장 힘없는 이들, 고통 받는 피조물들의 고통과 신음까지도
함께 호흡하고 고민하며 우리 자신의 삶의 궤적을 바로잡아가야 하지 않을까?
인간에게 먹는 것은 생존을 위해 가장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먹는 데에도 인간답게 먹고, 그리스도인답게 먹을 줄 알아야 하지 않을까?

2011. 1. 20
강우일 주교

 

 

 

 


최베네롦   11-02-03 23:59
참 신부님 말씀이 공감 가는 내용이 많네요.. 잘 읽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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