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굵고 짧은 것이 좋다.>
문득 건너편 좌석을 바라다보니 한참을 안보이던 형제가 보인다.
무척 신심생활에 열심인 그이기에 그를 볼 수 없었던 얼마간의 기간이 나에게 의식이 되었던 모양이다.
반가운 마음에 이런 저런 이야기를 건네다 보니 다른 형제에게 상처를 받아서 얼마동안 성당에 오기가 싫으셨단다.
상처.
남에게 상처를 준다는 것이 얼마나 쉬운 일인지 우리는 미처 깨닫지 못하고 산다.
나에게 조금이라도 이익이 된다던지, 다수의 눈길이 내가 향하는 곳을 향하고 있어 아무런 거리낌도 느낄 필요가 없다면 우리는 쉽게 남에게 상처를 주는 행동을 한다.
그저 즉흥적인 생각에, 미숙한 감정이 이끄는 대로 순간적인 마음의 움직임이 소중한 나 자신에게 먹칠을 하고 있건만 다들 그리 살아간다.
미사시간 중
보채는 아이의 울음소리와 참으려 해도 터져 나오는 기침 소리에 나는 어떻게 반응을 했었던가?
분명치도 않으면서 떠듬거리는 독서에 또 어떤 생각을 하였던가?
울어대는 것이 아이 의사소통의 본성일 터이지만 주위의 눈치를 보며 아이를 달래려는 자매님은 얼마나 곤혹스러울까?
떠듬거리는 독서 뒤에 숨겨진 흐르는 진땀을 나는 알아차렸던가?
오래 전에 첫 독서를 봉독하던 어느 나이 드신 형제님의 이야기가 기억이 난다.
미리 여러 차례 말씀을 미리 읽었건만 제단에 올라가는 것이 너무도 감격스러우셨다 했던가?
주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본성이 사랑이기에
아이를 데리고서라도 미사를 참여하는 이가, 독서 봉독의 감격에 떠듬거릴 수밖에 없었던 이가 주님의 눈에는 분명히 더 사랑스럽게 보일 것이다.
그렇다.
내가 보는 눈과 주님이 보는 눈은 분명히 다르다.
감히 자신을 주님이 마련하신 주춧돌이라 누가 장담하겠는가?
말씀이 또렷이 전달되지 않아도, 미리 읽어보지 않아도 낭독 솜씨만 뛰어난 나보다는 더 열심히 오늘의 말씀을 미리 준비한 아들이 더 보기 좋을 터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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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우리는 자신이 가진 잣대로 세상을 재단하며 산다.
나 아니면 안 된다는 사고방식이 너무 일상화되어 버린 된 듯싶다.
내 편이 아니면 모두가 적으로 만들고 밟아버려야 풀리는 직성들끼리 부딪치니 사회가 편할 날이 없다.
맨 날 긴 것(?)만을 사용하며 남을 힐난(詰難)하고 욕을 해댄다.
나는 多樣性이 사람 사는 모습의 진정한 가치라고 생각한다.
그저 획일적으로 똑같은 생각과 말과 행동만이 존재하는 사회라면 생각만 해도 숨이 막히지 않을까?
과연
내 곁이 아니라면 있을 이유가 없는 존재이고.........
내 눈길이 닿는 그 곳에 있어야만 내가 기억해야 할 존재가 되는 것일까?
또 내 잣대만이 세상의 유일한 잣대인 것일까?
나의 삶이란 칭찬만을 하며 살기에도 그리 긴 편은 아니다.
그래서
앞으로는 굵고 짧은 것을 내세우며 살고 싶다.
내 마음의 여유를 찾고 싶다.
사회의 다른 이들이 아무리 긴 것을 내세워도 난 굵고 짧은 것을 좋아하고 싶다.
좋아요, 잘했어요. No. 1. 짱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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