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강림 대축일
"오순절이 되어 신도들이 모두 한곳에 모여 있었는데 갑자기 하늘에서 세찬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들려오더니 그들이 앉아있던 온 집안을 가득 채웠다. 그러자 혀 같은 것들이 나타나 불길처럼 갈라지며 각 사람 위에 내렸다." (사도 2,1-3)
예수 부활 대축일로부터 만 7주간이 되는 50일째 되는 날을 성령강림대축일로 지내고 있다. 축일의 신약적 기원은 사도행전 2장 1절에 기인하고 있다. 오순절은 유대인들이 중요하게 기념해오고 있는 과월절, 처막절과 함께 3대 축일이다.
오순절은 칠주제(七主祭)라고도 불리우며, 이날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첫 곡식을 바치곤 했다. 특히 이 오순절은 시나이 산의 계획과 긴밀히 연결되고 있는데 이집트 탈출 50일째 되는 날에(출애 19, 1-16) 시나이 산에서 모세가 하느님께로부터 십계명을 받아 하느님과 계약을 맺은 날이기도 하다.
모세가 십계명을 받은 것은 곧 예수께서 주신 약속의 선물, 즉 성령, 사랑의 새 법과 상통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구약과 신약의 연속성을 이해할 수 있고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이 받은 새로운 계명의 의미를 보다 깊이 알아들을 수 있다. 오순절은 바로 우리 삶의 시작, 우리 삶의 현장이다. 예수를 보지 못해도 확신할 수 있는 새로운 관계의 현장이다. 오순절은 곧 천상 예루살렘의 지상 실현을 예시적으로 보여준 종말의 의미를 지닌 사건이기도 하다.
삼위일체
삼위일체의 교리는 예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것이지만 이 신비 앞에서는 인간 능력의 한계를 인정해야 한다. 육화의 신비, 즉 하느님이 인간이 되셨고 죽으셨고 부활하셨다는 교리도 인간 의식의 한계를 초원하며 동정녀의 예수 탄생 사건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삼위일체의 신비는 루가 1장 35절에 대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하느님의 아들을 낳게 되리라고 말하는 장면과 또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는 장면에서 성령은 비둘기 모양으로 , 성부는 소리로서 나타남으로(루가 3,21-22 참조) 우리에게 계시된다. 예수 자신도 제자들에게 사명을 주시면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라." (마태 28,19)고 하셨다.
하느님은 한 분이시지만 성부, 성자, 성령 삼위가 계시고, 성부는 창조주이시고, 성자는 구원자이시며,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발하셨다. 이 삼위께서는 각각 아버지로서, 아들로서, 영으로서의 일을 하신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 안에 산다는 것은 우리 신앙의 핵심이다. 성령은 삼위일체 하느님의 제3위로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면서 우리를 도와주는 "협조자"(요한 14, 16)다.
가톨릭 신앙은 하느님이 성령의 은혜를 통하여 우리의 가장 내밀한 곳에 거하심을 고백하고 있다. 그러나 성령은 단순히 우리가 마음으로 느끼는 하느님의 은총을 일컫는 것이 아니다. 성령은 완전한 하느님이다. 성부, 성자와 함께 성삼위 가운데 다른 위격과 구분되는 완전한 한 위격이며 성부와 성자와 더불어 함께 영원하고 동등하다.
성령강림 사건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오순절에 내려온 성령은 새로운 시대를 여는 신호탄이었다. 성령은 인류 역사에 구체적으로 개입하는 하느님의 현존이 되면서 구원역사의 새로운 시대를 개막한다.
우리는 성령강림을 통해 비로소 새로운 생명을 맞볼 수 있게 된 것이다.
부활한 예수는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지만 여러분은 오래지 않아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것"(사도 1,5)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성령은 우리를 깨끗이 정화시키고 생명을 주고 하느님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불붙여 주며 진정한 삶의 의미를 찾게 한다.
성령 안에서 사는 사람은 자주 감사와 찬미를 드리게 되고 자신의 기도에 응답하는 하느님을 체험한다. 성령을 통하여 성부는 죄로 죽은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며 마침내는 그들의 죽은 육신을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시킨다. (로마 8, 10-11)
성령은 교회와 어떤 관련이 있는가?
교회가 교회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바로 성령이다. 성령이 교회 안에 존재하기에 교회는 신앙의 유산을 간직하고 실천하며 모든 믿는 이들을 하나의 백성으로 유지한다.
성사도 모두 성령이 있기에 가능하다. 세례성사는 물과 성령으로 베풀어지며 고해성사도 사죄경 자체가 죄의 용서에 있어서 성령의 역할을 드러내고 있다. 병자성사의 기도문은 성령의 은총을 비는 청원이며 미사의 성찬기도에선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제병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변한다.
성령은 교회와 신자들의 마음을 성전 삼아 그 안에 거처하고(1고린 3, 16. 6, 19) 그들이 하느님의 자녀임을 증거 한다.(갈라 4, 6)
성령은 교회를 온전한 진리에로 인도하고(요한 16, 13) 일치시키고 교회를 가르치고 지도하며 항상 새롭게 한다.
성령의 선물과 특은
성령은 성화의 은총으로 죄를 없애고 하느님의 사랑에 참여할 자격을 주며 영신적으로 새 사람이 되는 힘을 준다.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초자연적인 덕성을 주어 사람이 구원진리를 올바로 믿게 한다. 성령은 이 기본 삼덕(믿음, 희망, 사랑)을 완성하는데 유익한 도움을 특히 견진성사를 통해 준다.
견진성사의 여러 가지 도움을 교의신학에선 7가지로 분류한다. 인간의 지성과 관련이 깊은 슬기(sapientia), 지각(intellectus), 의견(consilium), 지식(scientia)과 인간의 의지에 관계가 깊은 용기(fortitudo), 효경(pietas), 두려움(timor)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체험할 수 있는 성령의 모든 은사들을 이 7가지에 국한시킬 필요는 없다. 상징적인 의미로 받아들이면 된다.
성령의 식별
성령 영성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올바른 성령의 식별이다.
바오로 사도가 열거하는 은사들 가운데는 "어느 것이 성령의 활동인지를 가려내는 힘"(1고린 12, 10)이 있다.
교회는 이 특은이 각별히 필요하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의 내밀한 욕망, 세속적인 활동 등이 마치 성령의 활동인 것으로 착각할 때가 있기 때문이다. 어떤 언사나 행위가 신앙에 순종하고 믿음과 사랑으로 일치와 평화를 도모한다면 그것들은 성령의 업적임에 틀림없다. 그 대신 신앙을 등지게 하고 그리스도교적 사랑의 일치를 위협한다면 그것은 성령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다.(1요한 4, 2-6) 성령에 의한 결과는 무질서가 아닌 평화다.
성령과 영성생활
신자들 중에는 의외로 성령의 존재에 대해 무감각한 이들이 많다.
교회는 신자들이 신앙생활에 있어서 화살기도나 청원기도에 그칠 것이 아니라 보다 깊이 있는 영성생활을 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깊이 있는 영성생활은 성령을 따르는 삶을 살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 개개인의 영성을 재는 척도는 성령을 따르는 삶을 사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성령은 우리가 깨닫지 못하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끊임없이 작용하고 있다. 우리는 성령을 통해 보다 차원 높은 영적인 삶으로 옮아갈 수 있다. 많은 성직자들은 “라디오 채널을 맞추듯 항상 성령의 목소리에 안테나를 세우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고 권고하고 있다.
성령을 따라 사는 신앙인은 대부분 “항상 찬미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간다.”고 고백한다. 그들은 자신의 기도에 응답하는 하느님을 직접 체험한다. 성령은 하느님과의 친교로 인한 내적인 충만 감을 맛보게 한다. 성령을 체험하면 마음의 문이 열리고 일상을 찬미 속에서 살도록 한다.
Catholic Good News - 2001년 6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