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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어떻게 우리의 몸을 제병으
  ۾ : 테아     ¥ : 09-09-03 13:22     ȸ : 2097     Ʈ ּ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강론 중에 성체에 대한 생각을 하면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신자들에게 던졌다.

" 우리는 어떻게 우리의 몸을 제병으로 만들 수 있을까요? " 
  
그리고 답을 했다.

   " 여러분의 눈으로 나쁜 것을 보지 마십시오. 

     그렇게 함으로써 희생을 바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혀로 점잖치 못한 말을 하지 마십시오. 

     그것도 희생이 됩니다. 

     여러분의 손으로 죄를 짓지 마십시오. 

     이 또한 번제(燔祭)가 됩니다. "


♬ 주여, 나를 받으소서


 

요한 크리소스토모(344/354?-407)

안티오키아의 부유한 귀족 가정에서 태어난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당대의 가장 유명한 수사학자 리바니오스의 문하에서 교육을 받았다. 수도생활을 거쳐 사제가 되고 콘스탄티노폴의 주교가 되었다. 그는 이 세상이 그리스도교적이 아니므로 수도생활이 필요하다고 역설하였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세상이 하느님께로 돌아간다면 수도생활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젊은 시절 크리소스토모는 4년간 공동 수도생활을 하였고 2년간 은수자의 생활을 하는 동안 심한 극기로 인해 건강이 좋지 않아 안티오키아로 돌아 간 적이 있었다. 
4세기 안티오키아는 교회적으로 다소 복잡하였다. 인구의 비율로 보아 비신자들이 숫적으로 우세하였고 행정과 학원들을 거의 다 차지하고 있었다. 주교들의 대다수는 아리우스 이단에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었고 가톨릭 교회는 바울리노 주교와 멜레티오 주교가 주도하는 두 세력으로 갈라져 있었다. 이런 시대적 상황에서 요한 크리소스토모가 출생하여 성장하였다. 그는 다행히도 훌륭한 어머니의 지도하에 신심생활과 좋은 교육을 받고 수도생활을 거쳐 사제가 되어 설교가와 성서 주석으로 교회의 일을 하다가 콘스탄티노폴의 주교가 되어 고행전교자선 등으로 사제생활에 힘쓰면서 교회를 성실히 돌보았다. 여러 반대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무질서를 바로 잡는데 주력하였다.
사제들의 윤리생활을 강조하고 떠돌이 수도자들을 정주시켰으며 악한 표양을 주는 이들에게 윤리생활을 강조하여 과부들은 혼인을 하거나 그리스도인 신분에 맞는 합당한 생활을 하도록 조처하였다. 반대의 무리도 있었으나 백성들의 호응이 좋아 교회는 쇄신되어 나갔다. 뛰어난 웅변조의 설교와 정확한 교리 해설로 인해 '황금의 입'(金口)이라는 좋은 별명을 얻었다. 그의 설교와 빛나는 덕행은 동료 성직자들과 부패한 궁전의 환영을 받지 못하였다. 민중의 지지도가 높아 황제의 세력도 함부로 접근 하지 못하였으나 음모가 극도에 달하여 결국 귀양을 가던 중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그의 명예는 회복되었고 유해는 로마로 모셔졌다. 동정녀와 사제직에 대한 저서는 유명하다.
[가톨릭신문, 2000년 11월 5일, 전달수 신부(안동교구 다인본당)]

요한 크리소스토모

 

(그림설명)

사도 바오로의 편지를 설명하는 요한 크리소스토모. 거의 700여편에 이를 만큼 신약과 구약에 관한 설교를 남겼던 그는 특히 바오로 서간집을 애독했다.

 

마음사로잡는 뛰어난 설교가

신·구약 설교 700여편 남겨
삶과 관상생활 일치에 노력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을 공경하고 싶습니까? 그분이 헐벗고 있는 것을 볼 때 멸시하지 마십시오. 비단 옷을 차려 입으신 그리스도를 이곳 성전에서 공경하면서 바깥 추위속에서 헐벗고 고통당하시는 주님을 못본체 하지 마십시오. 제대 위에 계시는 그리스도의 몸은 제대보가 아닌 깨끗한 마음을 필요로 하십니다. 그러나 밖에 있는 그리스도는 많은 보살핌을 필요로 합니다. 그러므로 깊이 생각하고 그리스도를 그분이 원하시는 대로 공경하는 법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누구를 공경할 때 그의 마음을 가장 기쁘게 하는 공경이란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가 아니고 그가 원하는 대로의 공경입니다』(요한 크리소스토모 「마태오 복음 강해」 중).  
신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예언자적 힘이 넘치는 설교로 금(金)으로 된 입(口, Goldmund), 「크리소스토모(Chrysostomus)」라는 별명을 지니고 있는 요한 크리소스토모(344/354?∼407)는 동방교회 4대 교부 중 하나이며 안티오키아 학파중 가장 뛰어난 교부로 꼽힌다. 「금구」 라는 말처럼 설교자들의 수호성인 이기도 하다.  
안티오키아는 4세기 당시 교회적으로는 다소 복잡한 상황을 보이고 있었다. 비신자들이 숫적으로 우세하였고 이들은 행정과 학원들을 거의 다 차지하고 있었다. 또 주교들 대다수는 아리우스 이단에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었고 가톨릭교회는 바울리노 주교와 멜레시오 주교가 주도하는 두 세력으로 갈라져 있었다. 이런 시대적 상황에서 출생한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 안투사의 교육을 받고 자랐다. 
일반인들과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세속적 출세를 위해 공부하고 향락적 생활을 했던 요한은 그러한 생활에 염증을 느끼고 후에 다르소 주교가 된 테오도르와 함께 성서연구와 수덕생활에 관심을 가졌다.  
371년 멜레시오 주교로부터 독서직을 받은 그는 평소 갈망하던 수도 생활을 위해 4년간 광야에서 은수 생활을 하다가 아예 2년동안은 동굴에 들어가서 고행과 성독으로 일관하는 시간을 보냈다. 건강 악화와 어머니 안투사의 간곡한 요청으로 안티오키아에 돌아온 그는 381년 부제품을 받았으며 386년에는 사제로 서품됐다. 398년 테오필로로부터 주교품을 받고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로 임명된 후에는 부패한 성직자 수도자들의 화려한 생활을 질타하며 개혁을 시도했으며 신자들에게는 윤리적 쇄신을 강조했다.
또 황실의 허례허식을 비난하고 가난한 이들을 위해 여러 구호 사업을 시작하였다. 성직 매매를 한 6명의 주교를 면직시키기도 했다.
그러한 일들은 결국 황실과 반대파의 불만을 불러일으켰고 요한은 여러 차례 유배를 떠나야 했다. 결국 407년 흑해 극동쪽 피티우수로 유배를 가던 중 숨을 거두게 되는데 죽으면서 남긴 말은 『모든 것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는 영광 받으소서』였다.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그 자신의 삶과 가르침을 통해 활동적인 삶과 관상생활을 하나로 일치시키려 노력한 인물이었다. 평신도들도 복음에 따라 살아갈 것을 권유했고, 성서읽기에 몰두할 것을 요청했다.
거의 700여편에 이를 만큼 신약 과 구약에 관한 설교를 남겼던 그는 특히 바오로 서간집을 애독했다. 바오로 서간집은 그의 성서 인용에서 항상 단골로 등장하는 내용이었는데 실제로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바오로 서간집을 주해한 유일한 사람이다.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성서가 성직자들의 전유물이라 여기지 않았고 수도자들보다도 평신도들이 더 성서를 필요로 한다고 강조했다.
누구든지 집에 들어가면 성서를 손에 드시오. 지속적인 도움을 성서에서 얻고자 한다면 들은 것을 되새기시오. 다른 스승을 찾지 마시오. 여러분은 하느님의 말씀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 누구도 그분처럼 여러분을 교육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가 남긴 저서는 안티오키아 학파에 속한 학자중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그중 총 6권으로 된 「사제직」(De sacerdotio)은 요한 크리소스토모의 대표적 저서로 꼽히는데 우아한 문장과 숭고한 신학적 사상 내용으로 오늘날까지 고전으로 읽히고 있다. 그외 수도생활에 관한 「테오도로에게 권고」 「진정한 참회」 등이 있으며 236편의 서간도 전해진다. 
요한 크리소스토모의 저서 대부분은 미뉴(J.P.Migne)의 교부 전집에 18권 분량으로 전해오고 있는데 이는 개인적 명성 때문이 아니라 신학적 높은 가치가 인정됐기 때문이다. 당시 교회 정치 사회 문화에 대한 중요한 사료로 평가되는 저서들은 서방 교회의 아우구스티노와 비교될만 하다고 학자들은 밝히고 있다.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신자들의 실생활에 관심을 두었던 사목자였다. 자신의 수행(修行)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소외된 사람들의 비참한 삶에 함께 할 줄 알았으며, 그들 편에 서서 성찬의 의미를 사회정의와 사랑의 근본으로 해석한 교부였다.
연설가로서 뛰어난 재능을 보였던 그는 그러한 수사학적인 재능을 복음화와 하느님 백성에 대한 봉사에 사용했으며 또 인생의 다양한 상황에 알맞게 맞추어 말할 줄 하는 능력을 지녀 신자들을 신앙으로 감동시켰던 믿음의 교육자였다.
교육자들 부모들에게는 그들 역할의 존귀함을 설명하면서 「교육이란 인간 존재를 다듬어내는 예술중의 예술」이라고 했고 현재 교회에서도 강조되고 있는 「그리스도인의 가정이 작은 교회」라는 말을 남겼다.  
「성체성사의 박사」라는 칭호를 얻기도 한 그는 마리아의 영원한 동정성을 강조한 학자이기도 하다.

[가톨릭신문, 2004년 8월 22일, 이주연 기자]


요안나   09-09-03 23:43
'누구든지 집에 들어가면 성서를 손에 드시오. 지속적인 도움을 성서에서 얻고자 한다면 들은 것을 되새기시오. 다른 스승을 찾지 마시오. 여러분은 하느님의 말씀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 누구도 그분처럼 여러분을 교육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잘 담았습니다.
홈피를 통해 매일 말씀을 만날 수 있는 은혜에 감사드리며
이렇게 좋은 자료도 읽을 수 있어 행복합니다.
     
테아   09-09-04 09:25
밑줄 쫙~ ^^
애숙토롦   09-09-04 22:13
정말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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