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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야기나눔] 오늘은 로마 교회의 초기 순교자들을 위한 날입니다
  ۾ : 광야의롦     ¥ : 11-06-30 06:20     ȸ : 3489     Ʈ ּ
로마의 역사가 타치투스(P.C. Tacitus, 56-120)는
110년경에 쓴 연대기(Annales 15,44,2)에서,
예수는 티베리우스 황제(14-37)가 로마제국을 다스릴 때 빌라도 총독에게 처형당했다고 한다.
네로 황제의 박해는 그리스도인에 대한 로마 국가권력이 취한 첫번째 조치였다.
64년 7월 19일 네로 황제(54-68)가 로마 시내를 불지르자 시민들이 폭동을 일으켰다.
 이에 당황한 황제는 그리스도인들을 방화범으로 지목하고 4년 동안 (64-68) 심하게 박해하였다. 그리고 황제는 사법 절차 없이 그리스도인들을 닥치는 대로 살육하라고 지시하였다고 타치투스와 로마 주교 클레멘스의 "코린토인들에게 보낸 편지"(5~6장)가 이 박해사실을 증명해 준다.

박해란 강제력과 심리적 수단으로 교회의 자유를 억압하려는 탄압행위를 말한다.
박해는 정부가 직접 나서서 할 때도 있고, 정부의 묵인 아래 군중을 선동하여 탄압을 가하는 경우도 있다. 그 목적은 신자를 배교(背敎)시키고, 신앙 자체를 말살하려는 데 있다. 박해는 구약시대에 유태인들이 이방인들에게 혹독한 시달림을 받은 때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리스도교는 초기교회시대에 로마제국에서 10차례의 가혹한 박해를 비롯하여 16세기에는 왕권(王權)을 신장하려는 유럽의 군주들에 의해 많은 시련을 겪었고, 프랑스혁명 후 나폴레옹에 의해서도 큰 곤욕을 치렀다.

   아시아에 그리스도교가 들어온 뒤, 중국 · 일본 · 한국에서도 모진 박해를 겪었다. 20세기에 들어와서는 1917년 러시아에서 볼셰비키혁명이 일어난 뒤부터 ‘종교는 아편’이라고 하여, 신앙 자체를 말살하려는 공산주의 정책 때문에, 특히 8.15 광복 후 북한에서 철저한 박해를 당함으로써 그리스도교는 ‘침묵의 교회’가 되기도 했다.

   그리스도 교회를 창설한 예수 그리스도이교도들이 무조건 자기를 미워하기 때문에 자기를 믿고 따르는 신자들을 괴롭힐 것이라고 박해를 예언하였다(요한 15:20). 그것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지니고 그의 신자가 되었다는 사실만으로 사람들은 그리스도교 신자를 본능적으로 증오하고 박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뜻을 따라 베드로에서 시작하여 로마에 교회가 세워지기까지에는 무서운 시련을 겪어야만 되었다. 초대교회 시대에 로마제국에서 박해를 극복한 신앙의 힘이야말로 오늘의 그리스도교를 확립한 기초였다. 그러므로 박해의 역사로마제국에서의 수난으로부터 기록되어야 한다. 로마제국의 박해사는 그리스도교의 말살을 꾀한 폭군 네로시대(재위 : 54~68년)로부터 신앙이 공인된 밀라노칙령(勅令)까지의 3세기 동안을 말한다.

   * 로마제국그리스도교 박해 : 로마제국그리스도교에 박해를 가한 원인은 그들의 종교다신교(多神敎)와 그리스도교가 서로 받아들일 수 없는 상극(相剋)의 관계에서 온 것이다. 다신교로마제국의 국체에 잘 융합되는 종교였으나 일신교(一神敎)인 그리스도교와는 결코 타협이 될 수 없었다. 공화정(共和政) 말기부터 로마에는 국수적(國粹的)인 신에 대한 경배뿐만 아니라 이국(異國)의 신을 믿는 종교들이 들어왔다. 황제들은 전통적인 옛날의 신을 믿도록 힘썼다. 그러면서도 외국의 종교에 대하여 비교적 관대한 태도로, ‘찾아온 신’(di adventicii)으로 환영하였다. 하지만 국가의 신을 경배하는 것을 전제로 신앙이 허용되었다.

   그러나 유태교그리스도교는 일신교인 까닭에 그 전제를 수용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들에 대하여는 ‘공인된 종교’(religio licita)로 일단 신앙을 허락하고, 종교조직도 묵인하였으나 전교에 대한 제약을 가하였고, 유태교가 널리 퍼질 우려가 생기자 금지령이 내려졌다. 그리스도교의 경우는 그와는 달리 한 민족에 한정된 종교가 아니고, 포교활동도 다양하였으므로 교세는 착실하게 확장되어 갔다. 그래서 로마제국그리스도교를 차츰 꺼리게 되었다. 거기에 국가의 반대를 더 자극시킨 것은 민간의 여론이었다. 64년 7월 네로 황제시대에 로마에 대화재가 발생하여 빈민지구를 폐허로 만들었을 때, 폭군을 증오한 대중은 네로가 건축사업을 벌이기 위해 근위병들에게 불을 놓게 하였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위협을 느낀 네로는 무슨 짓을 해서라도 그 소문을 막을 수 있는 속죄양(贖罪羊)을 찾게 되었다. 역사가인 타치투스(Tacitus)는 네로가 “대중의 미움을 사고 있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서 속죄양을 찾아냈다”로 기술하였다.

   이 증오는 그리스도교 신자의 생활을 이해하지 못한 데서 온 것이다. 다신교를 거부하는 그리스도교 신자는 로마인들에게는 불손한 무신론자로 보였다. 그리스도 신자가 영성체를 하며 서로 ‘형제’요 ‘자매’하고 부르는 것을 가지고, 근친상간의 불륜관계를 맺는 무리요, 인육을 먹는 족속이라고 비방한 것이다. 그리스도교 신자는 마침내 민중 사이에 홍수같이 무서운 재난의 화근으로 악선전이 되었다. 내로는 이것을 이용하여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피비린내 나는 박해를 가하였다.

   로마형법에 교정된 사형방식은 참수(斬首), 하층계급에게는 책형(磔刑), 분형(焚刑), 석형(石刑), 경기장에서는 맹수형(猛獸刑), 익살(溺殺) 등이 가해졌다. 또 하층계급에 대한 징벌로는 광산노동, 상류계급에게는 재산몰수와 직위해제, 공훈박탈 등으로 배교를 강요하고, 여자는 창가(娼家)로 보내졌다. 로마제국에서 그리스도교가 법적으로 금지된 것은 네로 때부터인데, 신성모독죄(神聖冒瀆罪)와 불경죄(不敬罪)로 신자는 당연히 처벌받는 대상이 되었다. 트라야누스 황제(재위 : 98~117) 때에는 예수의 이름을 시인한 것만으로도 처벌에 가해졌다. 그리스도교 신자는 신앙을 포기하지 않고 “확고하며 꺾일 줄 모르는 고집 때문에 처벌을 받아 마땅하다”고 하여 사형이 선고되었다. 신앙을 버리고 배교하면 누구나 자유롭게 풀어주었다.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로마의 신에게 제물을 바치는 사람은 사면이 되었다.

   그러나 조직적인 박해는 데치우스 황제(재위 : 250~251) 때부터 시작되었다. 법률에 의하여 모든 국민은 로마의 종교로 귀의하도록 의무화시킨 것이다. 그리고 디오클레시아누스 황제(재위 : 284~305년) 때에 그 절정에 달하였다. 그의 잔인한 성격대로 무서운 형벌이 가해지고, 사형으로 생명을 잃은 그리스도교 신자는 8만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가혹한 상황에서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신자들의 독실한 신앙, 그것이 주위에 감명을 주고 그리스도교에 대한 인식을 근본적으로 뒤바꿔 놓았다. 그리하여 피로 물든 로마제국의 토양 위에는 찬란한 그리스도교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교회는 박해를 받으면 받을수록 도리어 자라서 아름다운 꽃을 피운다는 교회 고유의 진리를 증거해 주었다.



요안나   11-06-30 23:23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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